식물들은 이제 한 해의 생장을 천천히 마무리하고 겨울을 준비해야 할 때다. 그런데 요즘 주변 식물들을 보면 계절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낯선 모습이 눈에 띈다. 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새 가지를 내던 소나무와 곰솔이 다시 새 가지를 뻗고 있다. 어떤 나무에서는 한쪽 가지에 열매가 맺혀 있는데, 바로 옆 가지에서는 꽃이 피기도 한다. 한 나무에서 열매와 꽃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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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무 (위 왼편), 곰솔 (위 오른편), 상수리나무 (가운데 왼편), 모과나무 (가운데 오른편, 한편에 열매를 달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 가지를 내고 있다), 버드나무 (아래 왼편), 왕버들 (아래 오른편) |
우리는 이런 모습을 그냥 신기한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생태학자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식물이 계절에 맞지 않는 반응을 보인다는 건 식물 자체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 식물이 감지하는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세밀하게 환경 변화를 감지한다. 기온, 밤의 길이, 토양 수분, 햇빛의 양 같은 변화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절에 맞춰 자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가을이 오면 생장을 줄이고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한다. 낙엽활엽수는 잎의 엽록소를 분해해 단풍을 만든 뒤 잎을 떨어뜨린다. 조직의 수분 상태도 조절하면서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몸을 바꾼다.
이런 준비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식물의 잎과 가지, 줄기와 뿌리는 물관을 통해 하나의 수분 이동체계로 연결되어 있다. 겨울에 조직 속 수분이 얼면 세포와 물관이 손상되고, 심하면 나무 전체의 생존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그래서 식물에게 가을은 단순히 단풍이 아름다운 계절이 아니다. 다가오는 힘든 계절을 견디기 위해 몸을 바꾸는 중요한 준비 기간이다.
그런데 겨울을 준비해야 할 식물이 다시 새 가지를 내고 꽃까지 피운다면 어떨까. 따뜻한 날씨가 길어지면서 식물이 계절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다시 자라기 시작한 것이라면, 이후 갑자기 한파가 찾아왔을 때 새로 나온 어린 조직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계절의 흐름이 흐트러진다는 건 결국 생태계의 질서도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우리 산림에서는 더 심각한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소나무재선충병으로 붉게 변한 산림을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한라산과 지리산을 비롯한 백두대간의 아고산지역에서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은 나무들이 쇠퇴하고 말라 죽으면서 푸르던 산림이 회색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낮은 온도에 적응해 살아온 아고산 식물에게 빠른 온난화는 살아갈 공간 자체를 위협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건강한 산림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기후변화를 늦추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나무가 쇠퇴하고 죽으면 탄소를 흡수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더구나 죽은 나무는 이제 탄소 흡수원이 아니라 발생원이 된다. 온난화가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망가진 생태계가 탄소흡수 능력을 잃으면서 다시 온난화를 빠르게 만드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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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귀나무 (위 왼편), 뽕나무 (위 오른편), 아까시나무 꽃 (가운데 왼편), 아까시나무 (가운데 오른편, 위 가지에는 열매가 맺혀 있는데, 아래 가지에서는 꽃을 피우고 있다), 희어리 (아래 왼편, 뒤의 가지에서는 열매를 맺고 있는데, 밖의 가지에서는 꽃을 피우고 있다), 띠 (아래 오른쪽, 옆의 강아지풀은 열매를 맺고 있는데, 띠는 현재 꽃을 피우고 있다) |
이미 우리 사회가 배출하는 탄소가 국토의 자연생태계가 흡수할 수 있는 양을 크게 넘어선 상황에서, 탄소흡수원이 약해지고 발생원으로 변하는 문제를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제는 자연이 보내는 변화를 단순한 ‘이상현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미래의 위험을 알려주는 조기경보 신호로 읽어야 한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빠른 기후변화로 기존 서식지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진 생물을 더 적합한 환경으로 옮기는 이동 보조 (assisted migration)를 기후변화 적응전략의 하나로 검토하고 실제로 실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상나무를 비롯한 아고산 식물처럼 기후변화에 특히 취약한 생물을 대상으로 더 적극적인 보전전략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생태기후학 (ecoclimatology)이다. 생태기후학은 기후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만 살피는 학문이 아니다. 식물과 토양, 물, 탄소순환 같은 생태계의 변화가 다시 기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함께 연구한다. 쉽게 말해 기후가 생태계를 바꾸고, 바뀐 생태계가 다시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양방향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식물이 보내는 작은 변화도 중요하다. 꽃이 피는 시기가 달라지고, 잎이 나는 시기와 떨어지는 시기가 바뀌며, 나무의 생장이 늦가을까지 이어지고, 특정 지역에서 나무가 집단적으로 고사하는 현상은 모두 기후와 생태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려주는 정보다. 이런 신호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기후·수문·토양·탄소 자료와 함께 분석한다면, 미래의 생태계 변화는 물론 산불, 산사태, 홍수 같은 재난 위험도 더 일찍 파악할 수 있다.
재난이 발생한 뒤 큰 비용을 들여 복구하는 것보다,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미리 읽고 위험을 줄이는 편이 훨씬 현명하고 경제적이다. 따라서 기후변화 시대의 환경정책은 이제 사후 복구에서 사전 예방으로 중심을 옮겨야 한다. 그러려면 전국의 식물계절과 산림 쇠퇴, 생태계 탄소수지, 수문 변화 등을 꾸준히 관측하고, 이를 기후자료와 통합하는 국가 차원의 생태기후 모니터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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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창석 서울여자대학교 연구석좌교수 |
기후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미래를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이제 우리는 자연의 신호를 읽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생태기후학은 바로 그 신호를 과학적으로 읽어내고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네팔 재난이 보여준 결과도 결코 남의 일로 여기거나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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