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위해성, 6개 질병군으로 연결해 선별한다

황원희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6-09-25 22: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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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소비재에 포함된 화학물질과 혼합물이 암과 생식 장애 등 주요 비감염성 질환과 관련된 생물학적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보다 폭넓게 선별하는 평가 방법이 제안됐다. 독일 헬름홀츠환경연구센터(UFZ)와 스위스 식품포장포럼(FPF) 연구진은 266개의 유해결과경로를 분석해 세포독성과 산화 스트레스 등 핵심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15개 시험관 분석법을 선정했다.

다만 이번 연구는 특정 화학물질이 실제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규명한 역학 연구가 아니다. 질병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초기 생물학적 신호를 빠르게 찾아 추가 정밀평가 대상을 가려내기 위한 선별 체계를 설계한 연구다.

연구진은 화학물질 노출과 관련된 주요 비감염성 질환을 ▲암 ▲생식 장애 ▲대사질환 ▲면역질환 ▲심혈관질환 ▲뇌 관련 질환 등 6개 질병군으로 구분하고, 각 질병군에 연결되는 생물학적 경로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학술지 ‘환경 인터내셔널(Environment International)’에 발표됐다.

현재 소비재에 사용되는 수많은 화학물질은 건강 영향을 충분히 평가할 만한 독성 자료가 부족하다. 식품 접촉 물질의 경우에도 시험이 의도적으로 첨가한 개별 물질과 유전독성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 소비자는 포장재와 생활용품에서 방출되는 여러 물질과 그 분해·변환물질에 동시에 노출될 수 있어, 개별 물질 중심의 평가만으로는 혼합물의 영향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연구진은 ‘유해결과경로(AOP·Adverse Outcome Pathway)’를 이용했다. AOP는 화학물질이 분자 수준에서 생체에 작용한 뒤 세포와 조직의 변화를 거쳐 질병이나 생식 장애 등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단계별로 정리한 체계다.

연구진은 AOP 지식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487개 경로를 검토한 뒤 연구 목적에 적합한 266개를 추려 6개 질병군의 네트워크에 배치했다. 뇌 관련 질환에 연결된 경로가 84개로 가장 많았고, 생식 장애 65개, 암 52개, 심혈관질환 28개, 면역질환 27개, 대사질환 25개 순이었다.

각 질병군에 배치된 경로 수를 합하면 266개를 넘는데, 하나의 유해결과경로가 여러 질병군과 동시에 연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화 스트레스나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은 한 가지 질환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질병 발생 과정에 관여할 수 있다.

분석 결과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난 핵심 생물학적 사건은 세포독성으로 6개 질병군 모두에서 확인됐다. 산화 스트레스는 5개 질병군,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은 4개 질병군에 걸쳐 나타났다. 아릴탄화수소수용체와 에스트로겐수용체 활성화 같은 수용체 관련 반응도 여러 질병군에서 중요하게 나타났다. 반면 중성지방 축적처럼 특정 질병군에 상대적으로 특화된 변화도 있었다.

연구진은 이 같은 핵심 변화를 측정할 수 있으면서 단순성과 재현성, 처리 속도를 갖춘 15개의 다중 시험관 분석법을 우선 후보로 제안했다. 동물실험 없이 세포 기반 시험을 통해 단일 화학물질뿐 아니라 여러 물질이 섞인 혼합물의 생물학적 반응을 대량으로 선별한다는 구상이다.

새 시험 체계의 잠재적인 적용 대상 가운데 하나는 식품 포장재다. 포장재에는 제조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사용한 첨가제뿐 아니라 불순물과 반응 부산물, 분해산물 등 이른바 ‘비의도적 첨가물질(NIAS)’이 포함될 수 있다. 이들 물질은 종류와 성분을 사전에 모두 파악하기 어려워 개별 화학분석만으로 안전성을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다.

완제품 포장재에서 식품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물질을 추출한 뒤 15개 분석법을 적용하면 성분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질병 관련 생물학적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먼저 확인할 수 있다. 반응이 강한 제품이나 시료는 이후 성분 분석과 정밀 독성평가 대상으로 우선 선정할 수 있다. 연구진은 현재 이 접근법을 이용해 식품 포장재 유래 화학물질을 시험하는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진은 “우선순위 평가 항목을 고처리량 시험관 분석으로 전환함으로써 연구 결과를 실제 활용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다”며 “제안한 15개 분석 패널은 현재의 표준 관행보다 훨씬 폭넓은 독성 선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분석 패널이 알려진 유해 화학물질을 얼마나 정확하게 찾아내는지는 아직 검증해야 한다. 시험관에서 특정 생물학적 반응이 나타났다고 해서 해당 물질이 일상적인 노출 수준에서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킨다는 의미도 아니다. 실제 위해성을 판단하려면 노출량과 체내 흡수·대사, 용량과 반응의 관계, 장기 노출 영향 등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

이번 연구는 완성된 규제시험법이라기보다 기존의 개별 물질·유전독성 중심 평가를 보완할 출발점에 가깝다. 연구진은 후속 검증과 표준화가 이뤄지면 식품 포장뿐 아니라 다양한 소비재의 화학물질과 혼합물을 효율적으로 선별하고, 동물실험 의존도를 줄이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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