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청 발족 당시를 회상하며 이 글을 쓴다는 것이 상당히 의미 있다고 느끼면서도 무엇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내가 겪었던 젊음의 한 시절을 회고한다는 의미에서 아련한 추억들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우선 환경청이 발족하였던 80년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그때만 하여도 환경이라는 어휘는 생소한 단어였고 오히려 공해(公害)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던 시절이었다. 환경이라 하면 조경(造景)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환경청이라는 기관이름도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 외에는 별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당시 일화로, 지방에서 올라왔던 한 환경청직원이 대출을 알아보기 위해 어느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었단다. “여기 환경청인데요…”, “네? 누구요? 황(黃) 누구시라구요?”
“황(黃) 누구시라구요?”
1980년 당시 우리나라 대기오염은 굉장히 심각했다. 아황산가스, 분진, 그리고 자동차 배기가스 등 모든 오염물질이 일반적인 환경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상태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황산가스를 제외하고는 환경기준도 없었다) 특히 80년 겨울 서울 도심의 아황산가스는 50년 ‘런던스모그’ 사건 당시의 수준에 가까울 정도였고, 가정연료의 70% 이상이 연탄이었기에 분진의 오염도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다만 서울은 바람·습도와 같은 기상상태가 런던보다 훨씬 양호했고, 분진과의 상승효과도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미국에서 13년간 학창 및 직장생활을 통해 환경문제의 심각성과 대책들을 경험하고 ‘유치과학자’로 귀국한지 2년 남짓한 당시의 필자로서는 정말 아찔하도록 놀라운 상황이었다. 봄이 가까워지면서 첫 번째로 맞이하는 국회가 열린다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국회가 열리면 상임위원회 업무보고가 있고 그때 서울의 대기오염도도 보고하게 되어있다. 대기오염도가 보고되고 언론에 발표될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되어 벌써 속이 타는데 담당 과장은 태연한 모습이다. “李 과장님, 서울의 오염도가 이렇게 높은데 걱정이 안됩니까?”, “국회나 언론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에 하던 대로 ‘서울대 측정소’ 자료를 발표하면 됩니다.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당시 서울시내에는 10개정도 대기오염자동측정소가 있었는데 그 중 ‘서울대 측정소(신림동)’는 서울대 뒤편 경계의 관악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관악산 깊숙한 공기 잘 통하는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으니 오염도도 배경농도로 사용할 정도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초 어느 쌀쌀했던 겨울 아침, 출근하여 청장실 아침회의에 참석하려고 나서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주한 미국대사관 과학관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안국동 로타리에 있는 B여고에서 때는 난로(당시에는 마세크탄 이라고 하는 일종의 조개탄 사용)에서 나오는 노란 연기가 길 건너편에 있는 미 대사관 직원숙소 단지로 날아와 완전히 뿌옇게 덮었다고 한다. 직원들이 식사도 제대로 못했고 어린아이들이 기침을 하는 등 피해가 고조되고 있으니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회의참석은 고사하고 시교육위원회로, B여고로, 기상청으로 전화기에 매달려야만 했지만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대책이라곤 B여고에 사정해서 추운 날씨에도 난로 사용을 조절해 달라는 부탁이나 하고, 기상자료를 들여다보니 바람의 방향이 서풍으로 바뀌고 풍속이 강해지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당시 환경에 관심이 높았던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 오염상태에 대한 항의가 상당히 높았지만 초창기 환경청에서는 인력이나 자료도 못 갖춘 상황에서 중앙부서로서 오염저감을 위한 대책보다는 민원 업무처리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민원에 급급했던 환경청
… 강경정책으로 선회
198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정책개발이 시작되었고, 당시 대기보전국의 3대 주요정책과제는 고정오염원에 대한 ‘저유황유 공급’, 지역 오염원의 ‘고체연료 대체(청정연료 공급)’, 이동오염원인 ‘자동차 배기가스 저감’이었다. 이러한 대책들은 80년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되었고, 결과적으로 ‘정책의 지속’으로 우리나라의 대기는 차츰차츰 개선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80년 여름, 한국전력 당인리발전소에 유황분 0.3%짜리 초저황 방카C유를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유황분은 낮으나 왁스분이 높아 B-C유가 굳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운반, 저장, 사용시 배관전체를 가열해야하는 비교적 값싼 기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저황유 공급의 효시가 되기도 했던 이 일은 정책적, 경제적 사유에 기인한 한국전력 위주의 결단이었으나 환경청 입장에서는 두 손을 들고 환영해야할 대사건이었다. 필자는 기쁜 마음에 청장실에 보고하기 위해 뛰어 올라갔다. 보고를 듣던 청장께서 “조 국장, 발전소 연료가 바뀌면 언제부터 서울의 아황산가스 오염이 줄어드나?”, “연료가 바뀐 바로 그날부터 오염도는 낮아집니다”,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아니 그렇게 얘기 하지마, 외부에 나가 설명할 때는 2~3개월 정도 지나면 차츰 좋아진다고 해”, ‘이게 또 무슨 이야기인가? 공무원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되는구나…’
하여간 서울 전체 아황산가스 배출량의 19%를 차지했던 당인리 발전소에 저황유 공급이 이루어진 다음날부터 서울 도심의 아황산가스 오염도는 낮아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효과를 계기로 본격적인 저황유 공급대책의 추진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 아황산가스 최대오염원이었던 연료용 B-C유(전체 아황산가스 배출량의 70%정도)는 유황분 함유기준이 4.0%였고, 일반적으로 4개 정유회사에서 공급되는 B-C유의 유황분은 3.5% 전후였다. 그런데 대기보전국에서는 처음으로 도입된 모델링 결과를 근거로 유황분 함유기준을 1.6%로 낮추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막강한 정유회사들이 펄쩍 뛰었다. B-C유 유황분 1.6%를 맞추기 위해서는 값비싼 저유황 원유를 도입해야 되고, 필요에 따라서는 1.6%이하 B-C유를 직접 수입해야 하는데 별 볼일 없는 환경청이 왜 난리냐는 것이다.
환경청의 입장이 워낙 강경하다보니, 업계 대표였던 가장 규모가 크던 국영정유회사의 반발이 굉장히 거셌으나 결국은 유황분 2.5% 라는 타협안을 제시해 오기도 했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실정을 잘 몰랐던 것이 약이 되었는지, 끝까지 고집을 부려 ’81년 중순경부터 서울지역에 유황분 1.6% B-C유를 공급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성공이었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아황산가스 오염도를 낮추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때를 회상해 보면, 지금도 언론과 환경전문가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업계의 거센 반발‘승용차 촉매정화기’유보
고체연료 대체를 위한 청정연료(LNG, 도시가스 등) 공급계획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이라는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여론과 관계부처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고 GDP 성장에 따른 국민생활수준의 향상이 있었기에, 어려웠지만 도시가스 확대공급, LNG 도입 등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특히 거국적인 국제행사나 심각한 환경오염 피해는 환경행정의 발전을 한 계단 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고체연료 대체에는 당시 도시가스 공급이라는 시기적인 또 하나의 전기가 있었고, 에너지담당 부서인 동력자원부의 이해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되는데 ‘청정연료 공급확대 공청회’에 참석해 가스 공급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다보니 업체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고 본의 아니게 오해받았던 일도 지금은 하나의 씁쓸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자동차배기가스 저감대책은 필자의 재임중 실제로 기획은 거의 끝내고도 실행은 보지 못했으나, 흥미로운 한 가지 체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환경청이 창설된 80년, 우리나라 승용차는 배기가스 오염이 엄청났다. 당시 미국 자동차와 비교해보니 오염배출량이 10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같은 해 늦은 봄 이었나 자동차 3사(H,D,K사) 간부들을 불러 회의를 소집했다. 그때 필자는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 미시간 주정부, 알곤 국립연구소에서 대기오염 규제 및 기준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다루었고, 또 미국 환경청 및 에너지성의 여러 가지 연구사업에 직접 참여해 왔으므로 승용차 배기가스 저감을 위해서 3원촉매정화기의 필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회의 때마다 정화기 부착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80년 당시의 우리나라 정치, 경제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62년 우리나라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래 매년 10%에 가까운 성장률이 지속되었으나, ’79년 박대통령 서거와 함께 ’80년 처음으로 마이너스 5.2% 성장이라는 최악의 경제 상태를 맞았었다.
정치적 혼란, 부처간 협의 등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과 함께 자체적인 준비부족으로 의욕을 갖고 추진하던 승용차 촉매정화기 부착이라는 정책결정은 그해 가을도 못 넘기고 유보되어야만 했다.
적절한 규제 기술개발 위한 촉진제 될 수 있어
대기보전국을 맡은 지 4~5년, 이제 행정도 어느 정도 익숙할 무렵인 ’84년경 어느 날, H사 부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80년 당시에는 전무로서 환경 관련 회의에 참석하곤 했던 분이 승진되어 있었는데 언제 만나서 저녁이나 같이 하고 싶단다.
마침 시간이 있던 날 저녁에 만나 이런 저런 일 이야기 하면서도 사실은 전화를 건 이유가 상당히 궁금했었다. 그러다가 반주를 몇 잔 하고서야 만나게 된 이유를 듣게 되었다. ’80년 당시 필자가 회의를 주재하면서 3원촉매정화기 부착에 따른 기준 강화를 강력히 주장했을 때, 당시의 회사 경영 여건상 완강한 반대를 하면서도 내심 무척 당황하고 우려했었단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강력한 반대 의사를 관련 요로에 다니며 설명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연구진에 특별개발팀을 구성해 촉매정화기 부착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단다. 결과적으로 H사에서는 원래 한국 승용차의 미국 시장 진입을 ’86년으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가장 우려하던 환경규제와 안전 규제를 2년 앞당겨 합격하게 됨으로써 H사의 자동차는 ’84년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하게 되었고 당시로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 ’80년대 초반 언제인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당시 만났던 일본 환경청 초대 대기보전국장의 충고가 떠올랐다. 10년간 대기보전국장직을 역임했다던 노(老) 교수는 “본인은 의과대학 출신이라 기술을 잘 몰랐으므로 70년대 중반 자동차 업계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배기가스 기준을 대폭적으로 강화했는데, 그것이 오늘날(당시 80년대) 일본 회사가 어느 선진국보다 좋은 자동차 엔진을 개발해 미국이나 유럽 자동차회사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면서 “적절한 규제강화는 기업의 기술개발을 위한 촉진제가 될 수 있다”고 하던 이야기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그날 필자는 진정한 감사의 뜻으로 사는 저녁을 즐거운 마음으로 들 수 있었다. 더욱이 그날은 유보되었던 승용차배기가스 저감대책이 다시금 시동되던 날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서울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이러한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다시 찾게 해준 후배 공무원들에게 감사드린다. 그저 초창기 우리의 ‘환경호 사공’들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할 사연으로 점철된 옛날의 그 시절을 회고하며 조용히 미소를 머금을 뿐이다.
조병환 (당시 대기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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