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 시시닷컴] 천천히 걷는 글

김한결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3-06-15 12: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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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는 글 - 고경숙

글에도 걸음이 있다

눈뜨자마자 읽는 詩 한 편은 묵정밭을 지나 들길을 산책할 때의 속도로 나른하다 걷다 눈에 띄는 들풀이 있으면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고, 시냇물 건널 땐 폴짝 리듬을 타고, 시의 걸음은 비교적 완보다 거친 유세 문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발을 삐기 십상이다 경사가 심하고 뾰족한 바윗길이어서 보폭을 줄이고 신중히 걸어야 한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며 일기를 만난 적 있다
관절염으로 ㅇ자가 되어버린 엄마의 일기는 몇 발짝 가다 쉬고, 한숨 몇 번 쉬다 걸었나보다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내용은 반복이다

내 걱정은… 마라… 밥은… 꼭… 꼭… 챙겨 먹고…
보내준… 돈… 고맙고… 미안… 하다


-『고양이와 집사의 봄』,(시산맥, 2023)
 




까치걸음, 깽깽이걸음, 노루걸음, 잔걸음, 잰걸음, 종종걸음,
쪼각걸음, 터벙걸음, 황소걸음 등 걷는 데에도 많은 걸음이 있듯이
글에도 다양한 걸음이 있다.
거친 유세 문구를 읽을 때는
큰 걸음으로 바삐 걸어가는 터벙걸음을 해서는 안 된다.
보폭을 줄이고 신중하게 걸어야 한다.
바삐 가다가 발밑에 뾰족한 돌멩이가 불쑥 나타나
발을 삐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때도 재거나 종종걸음으로 걷지 말아야 한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걷거나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쪼그리고 앉아
다시 시어를 생각해 보고 시와 시 사이 행간도 살펴보며
시인의 의중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시를 큰 소리로 읽으며 리듬을 타기도 해야 한다.
다른 어떤 글보다 가슴을 치는 글은 돌아가신 엄마의 일기다.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반복적으로 쓴 글이지만,
줄임표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았는지,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평생을 사셨는지……,
먹먹하다.

글. 박미산 시인/ 그림. 원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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