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사물도 정치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을까

‘사물의 의회’ 구상, 현실 정치의 문을 두드리다
황원희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6-03-03 1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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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사물의 의회를 현실정치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물의 의회는 자연과 기술 및 생태계 같은 비인간(사물)도 공적 의사결정의 당사자로 대표·번역해 참여시키려는 정치 모델이다. 이 개념의 핵심은 비인간을 의인화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관측·사건·증거를 통해 비인간의 응답을 읽고 말로 조직하는 절차를 만드는 데 있다. 그 절차를 통해 인간 중심 대표성의 한계를 보완하고, 공적 합의의 범위를 공통세계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근대적 세계관이 위기의 원인

▲AI생성형 이미지 
사물의 의회가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는 근대적 세계관이 우리가 겪는 문제의 원인”이라는 진단에 따른 것이었다. 근대는 자연과 인간(문화)을 분리하고, 과학과 정치를 엄격히 나눠 작동해 왔다. 이런 분리는 의사결정을 ‘쉽게’ 만들었다. 과학은 사실을, 정치는 가치를 다루는 것으로 구획해 두면 판단의 책임과 경로가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김지연 고려대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교수는 “과학의 ‘사실’ 결정과 정치의 ‘도덕적’ 결정이 분리된 채 진행되면서, 실제 현실에서 서로 얽힌 문제들 즉 감염병 대응, 생태·기후·환경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 맺는 법을 소홀히 했고, 그 관계를 학습·훈련하는 능력도 약화됐다.”고 말한다.

과학의 집과 정치의 집…현실성은 있으나 불법적, 정치는 있으나 허구적
라투르의 유명한 비유도 소개됐다. 근대 사회는 두 개의 ‘집’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집은 과학의 집으로 과학자가 대표하는 세계이다. 이는 실험과 데이터, 세계를 설명하는 힘을 가진 지식이 중심이며, ‘사물(비인간)을 대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두 번째 집은 정치의 집으로 선출된 공직자(대통령, 국회의원 등)가 대표하는 세계. 가치·관심·정당성의 문제를 다루며, ‘인간을 대변’한다. 겉으로 보기엔 이 구조가 안정적으로 운영돼 온 듯하지만, 핵심적인 결함도 갖고 있다.
 

첫 번째 집은 현실성을 갖지만 공적 합의와 절차가 결여돼 불안정하다. 라투르는 때로 이를 “불법적(illegal)”이라고까지 부른다. 실험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생산된 ‘진실’이 공적 세계에서 진실로 보증되는 과정이 취약하다는 문제다. 두 번째 집은 공개된 절차를 통해 정치적 공식성을 갖지만, 사물의 현실성을 충분히 끌어오지 못해 사회적 구성물(허구성)에 기대게 된다. 결국 근대의 의사결정은 ‘사실(과학) vs 가치(정치)’라는 분할 위에서 정당성을 얻으려 했지만, 현실에서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는다. COVID-19 대응은 과학과 정치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언급됐다.

사물을 다시 소환하라
이 지점에서 라투르가 던지는 처방은 명확하다. 정치 공간에서 배제돼 왔던 사물들을 다시 불러와, 그들이 대변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과 정치를 동시에 다루는 새로운 정치 제도를 발명해야 한다. 또한 김 연구교수는 “‘사물의 의회’ 논리를 뒷받침하는 논의가 풍부하지만 난제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을 대변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물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아는가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 이전의 인간—언어 없이도 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던 인간—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을 소개하면서도, 근대적 이분법이 사물을 ‘대상, 객체, 수동성’으로만 취급해 온 탓에, 사물의 행위성과 권리를 상상하기 자체가 어려워졌다고 짚었다.
 

이 과정에서 미셸 세르의 자연계약이 언급됐다. 세르는 정보가 인간만 발신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도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에 신호를 보낸다고 본다. 세계는 인간만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거대한 소통망이며, 관건은 비인간을 의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의 소통 방식을 학습하고 이해하는 절차”를 만드는 데 있다는 설명이다.

유엔 총회 형식에 ‘비국가 대표단’을 끼워 넣다
라투르가 사물의 의회를 구현한 대표 실험으로 2015년의 협상의 극장이 소개됐다. 유엔 당사국총회(COP) 형식을 차용해 의제를 설정하고 협상을 거쳐 협약문을 만드는 구조를 유지하되, 차이가 있었다. 국가 대표단만이 아니라 “비국가 대표단” 즉 공기, 북극·남극, 아마존, 사막, 도시, 바다 등 사물, 비인간을 대표하는 주체를 포함시킨 것이다. 당시 약 42개 대표단이 꾸려졌고, 이 중 18개가 비국가 대표단으로 배치됐다. 각 대표단은 정부·경제·시민사회·과학지식·자연(비인간) 역할을 맡은 5명 내외로 구성해, “사물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대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부 구조로 끌어들였다.
 

김 연구교수는 “비국가 대표단의 존재가 기존 국가 중심 협약의 편향과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국가는 영토와 통치 구조상 지구 생태에 구조적으로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는데, 국가들끼리만 모여 협의하면 “공모 관계” 혹은 맹점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비국가 대표가 들어오면 국가의 영토권이 사실상 사물의 영토를 침해해 왔다는 점이 선명해지고, 협약의 대표성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하나의 성과로 학습과 실천의 동시성을 꼽았다. 이 실험은 참가자들에게 정서적·인식적 변화를 유발했고, “학습을 끝낸 다음 실천한다”는 근대적 분업을 흔들며 학습과 실천이 한 자리에서 함께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다만 단발 실험이라는 한계도 함께 제시됐다. 더 다양한 버전의 실험이 축적돼야 절차·대표성의 발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25년 시민과학자가 시작한 한국형 모델
두 번째 축은 2025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사물의 의회’ 실험에 대한 평가다. 10개 대표단으로 축소됐지만 무엇보다 “학자·정부가 아니라 시민과학자가 최초 발의했다”는 점이 의미있다고 할 수 있다. 시민과학센터에서 활동해 온 주체들이 펀딩과 조직을 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시민합의회 모델 등 심의민주주의적 방법론이 결합됐다는 관찰도 나왔다.
 

다만 이론에서 실천으로 넘어오니 틈이 다소 많았지만 현실은 국소적이고 맥락이 복잡하며 이해관계가 다양해, 설계·집행 과정에서 길을 잃기 쉽다. 특히 “비인간을 번역하는 권한”이 수행자에게 크게 부여될수록 책임과 권한의 문제도 커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빠른 제도화보다, 반복 실험과 확산이 먼저
결국 이러한 사물의 의회 개념은 ‘현실 정치로의 빠른 진입’ 욕망을 경계해야 한다. 국회에 즉각 요구안을 던지기보다, 시민사회 내부에서 사물의 의회를 반복·진화시키며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힘을 키우는 전략이 현실적이라는 제안이다. 특히 지역 단위에서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사물의 의회가 확산될 가능성이 언급됐다. 예컨대 제주도의 해녀, 양돈업, 해양오염, 노동자 등 지역의 갈등과 생태 조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실험을 반복하면, 갈등 자체가 오히려 학습과 정치의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김 연구교수는 끝으로 “정치는 말로 원을 만드는 일”이라는 라투르의 취지를 강조했다. 말은 사라지지만, 말을 계속 생산하고 감고 강화할 장치가 있으면 원(공적 합의의 장)이 만들어진다. 사물의 의회는 그 장치의 한 형태이며, 아직은 모델이지만 비인간 권리 담론의 확산, 대중적 흡입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민들의 갈증이 결합될 경우 잠재적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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