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서린 묵화 한 점 - 박노식
어둔 방에 누워 창을 보면 밖의 불빛이 한 점 묵화를 그려 넣는다
좌우의 창문이 펼쳐놓은 화폭 같다
한 획이 길게 지나간 나뭇가지는 여러 번 휘었다
잎이 없고 새가 없으므로 손끝에 침을 발라 허공에 그려 넣는다
창유리에 닿은 새벽이슬은 화폭의 먹을 풀어버린다
방안이 서서히 하얘지는 건 근심이 오는 징조다
저 묵화 한 점이 지워질 때 나의 위안은 더 없다
아침은 불안을 안긴다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2022)

강원도 화천에 작은 집을 마련한 후부터 필자는 그곳에 자주 내려간다.
글을 쓰겠다고 노트북을 챙겨가지만,
시골집에서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시골살이라는 것이 왜 그리 일이 많은지 쉴 틈이 없다.
따가운 볕을 등에 진 채, 작고 순하고 가냘픈 생명들에게 물을 주고
전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다가 구름을 놓친 새들을
챙기다 보면 금방 하루해가 진다.
어두운 방에 누워 창밖에 있는 밤하늘의 별과 반딧불과 눈을 맞춘다.
고요한 밤에 커다란 창문 두 개를 화폭 삼아 묵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저 멀리 굽이굽이 산등성이와 창문 바로 앞에
크고 작은 나뭇가지들과,
피곤함에 지쳐 잠자러 간 새를 부르고
마당에 떨어진 이파리를 끌어모아 묵화를 완성한다.
밤새 완성한 묵화 위에 새벽이슬이 내려앉으며 먹을 풀어놓는다.
묵화의 향이 번지는 그윽했던 방안은
새벽이 오면서 점점 하얘지고
지난밤 근심과 불안을 없앴던 묵화 한 점을 지우는 아침이다.
나에게 다가온 단풍이파리도 달도 새도 별도 반딧불이도 지워진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간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래도 이 아침이 지나가면 새로운 묵화를 그릴 수 있는 밤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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