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 시시닷컴] 실겅

글. 박미산 시인 / 사진. 김석종 작가
김한결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3-01-05 14: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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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겅 - 홍경나

대청 바라지문 위 실겅에는
북어쾌 마른오징어 피문애 합자꼬지를 쟁여논 큰 대나무 당세기
지난 가을 갈무리해둔 보얗게 분 오른 대접감이 또 한 당세기

봉제사접빈객 때마다 내리던 크고 작은 통영반과
산자 약과 콩강정 깨강정 쌀엿을 담은 버들동구리는 층층으로 쌓여있다

고뿔들 때마다 뜨건 물에 타마시던
누런설탕봉지가 담긴 땅콩초배기

그 옆엔 꿀이 든 청목단 왜사기단지
할머니 뇌신과 내 원기소 아까징끼 됴고약(趙膏藥) 금계랍(金鷄蠟)과 일제 용각산을 담은
군데군데 거멀못을 댄 이남박은 맨 귀퉁이에 얹혔다

쩔쩔 끓는 구들목에서 메주내 나는 이불을 둘러쓰고
선잠 깬 나는 연시가 먹고 싶고

잣눈이 댓돌까지 와 쌓이고 장지문 틈으론 황소바람 스미고
사창댁 할머니가 30촉 알전구를 켜러 시린 발뒤꿈치를 들었다

-『초승밥』(현대시학, 2022)

 


많은 눈이 댓돌까지 쌓이고 장지문 틈으론 황소바람 스미는 새해.
명절을 앞둔 실겅(시렁)엔 북어쾌, 마른오징어, 삶아 말린 문어,
홍합과 담치를 대 꼬치에 꿴 것을 담은 고리짝과
보얗게 분 오른 대접감을 담은 고리짝이 있다.
산자 약과 콩강정 깨강정 쌀엿을 담은 버들동구리가 층층으로 쌓여있고
그 옆엔 바구니와 꿀단지가 있고
할머니 뇌신과 내 원기소 아까징끼 조고약(趙膏藥)
금계랍(金鷄蠟)과 일제 용각산을 담은 이남박은 그 곁에 있다.
쩔쩔 끓는 구들목에서 메주내 나는 이불을 둘러쓰고 잠들었다가
선잠 깬 어린 나는 연시가 먹고 싶었다.
연시를 먹고 싶다는 손녀를 위해
키가 작은 사창댁 할머니는 30촉 알전구를 켜러 시린 발뒤꿈치를 들어 연시를 꺼냈다.
유년 화자의 시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술되는 시렁의 풍경은
토속적인 가족 공동체에 내재하던 행복한 원체험의 기억을 환기하게 시키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할머니도, 시렁도, 전통적인 삶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새로 맞는 계묘년에도 태양은 여전히 붉게 떠오른다.
기억 속의 시렁과 함께,

 

[저작권자ⓒ 이미디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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