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 시시닷컴] 장미는 생활

김한결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4-02-20 23: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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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는 생활 - 권현형

시나몬 가루에서 분필 냄새가 나는 정오
고공으로 흩어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말의 심사를 이해하게 된다
심장이 얼얼하도록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
꽃 대신 파를 한 아름 산다

본 적 없는 얼굴에 사로잡혀 있다
유의어라는 것에 관해 이제 조금 알겠다
어떤 성인은 아름다운 얼굴을 잊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맨몸으로
장미 가시덩굴 위를 뒹굴었다고 한다

희생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하는 행위들
굴곡이 많은 장미는 철학적이다
꽃잎 가장자리마다 에둘러 피어나는
신성과 세속의 이중생활

지난 계절의 가시까지 기억난다
미농지 두께로 손톱이 얇아져서
나는 나를 할퀴고 있다

내면에 고통이 쌓이면 바깥의 높이가 무의미하다
아까워서 차마 펼쳐보지 못한 순간들
찢어지지 않고 구겨져서 다행이다
솟구치는 언어처럼 푸른 파 한 단이 솟구쳐 올랐다
어둠에서 탈출하니 장미향이 매콤해 눈물이 난다

-『아마도 빛은 위로』 (여우난골, 2023)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믿음과 수도생활에 투철한 성인이었으나,
성욕을 떨치기 어려워 자신의 음탕한 욕망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틈만 나면 장미 가시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데굴데굴 굴렀다고 한다.
성인도 그럴진대 하물며 우리같이 평범한 인간들은 이상과 현실 속에서
늘 번민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장미를 사나?
아니면 오늘 그를 위한 음식 요리에 필요한 파를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결국 생활에 필요한 파를 한 단 산다.
장미와 파 한 단.
신성과 세속,
늘 이상과 현실에서 갈등하는 우리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생활이다.
푸른 파 한 단에 눈물 흘리는 일도,
사랑하는 그에게 바치는 장미향도,

 

글. 박미산 시인/ 그림. 원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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