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우리나라 샘물 가운데 태풍의 눈(정치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표적 기업을 꼽으라면 아마도 '장수천' 샘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과 연관, 정치적 논리에 휩쓸려 사회적으로 매번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지만 장수천의 현실은 '97년부터 4년 간 여느 샘물회사처럼 경영에 허덕이는 샘물회사의 하나일 뿐이었다. 왜 하고많은 사업중 이 사업을 선택했는가하는 동정과 안타까움의 그저 그런 영세 샘물회사일 뿐이었다. 현재 국내에서 허가된 80여 샘물회사중 정치권과 연계되거나 관련이 있는 기업들도 상당수 있다. 지역의 대표적 정치인과 연계하여 혹은 친형제간으로, 친척이나 동업자로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샘물을 잠시 조명해보자.
정치인과 관련된 샘물회사들
대부분 경영난·역차별에 시달려
실례로 정치적 관련이 직·간접적으로 있거나 한때 연관되어 있었던 샘물회사는 11대 국회의원(전국구)을 지낸바 있는 김노식씨가 운영하는 설악음료(용마건설의 연대 보증으로 부도 / 현재 후발로 설립한 백룡음료가 자립하고 있음), 리더음료(대표 김용신-과거 민주당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 수산음료(대표-김남경-한나라당으로 상주에서 국회출마낙선) 돌샘물(국세근-兄 국창근씨가 담양에서 출마 민주당 국회의원 역임), 거평샘물(거평그룹 사주와 보성 고향의 박주선 현의원), 산수음료(창립사주인 김효선씨가 서울시의회시의원활동)등이 그려진다.
그렇다고 이들 기업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거나 기사로 거론되는 기업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역차별을 당하거나 더 많은 현실적 어려움과 시련의 아픔을 겪었다는 점이 공통사항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샘물사업의 분위기는 잘못 편파적 운영을 하다보면 시민과 언론에 직격탄을 받기가 쉬웠다. (당시는 생수사업으로 호칭)
겉은 화려한 배경을 지닌 기업들이지만 실제로 이들 기업은 운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설악음료는 과거 보건사회부 시절, 기존 14개 업체 중 마지막으로 허가받아 94년까지 탄탄한 기업 운영을 하였으나 IMF와 함께 친형이 운영하던 용마건설이 부도나면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일부에서는 정치나 사업 중 택일했어야 한다는 동정반, 질타반의 충고도 아끼지 않았던 대표적 기업이다. 설악의 김노식 사장은 초대 샘물협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11대 국회에서 전국구로 정치에 입문하여 국방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덕분에 현직 국회의원들과 상당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로 업계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업은 분명 정치적 논리로 풀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할말도 제대로 못했으며 더러 업계를 대변하여 관련부처에 정중한 의사전달을 하면 실무공무원들에게 적색리스트로 등록돼 기업운영에 더 어려운 고통을 받아야 했다. 실례로 수질적발시 상대적인 유명세에 언론에 '설악등 5개사' 라는 제목으로 거론되며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어 설악의 식구들과 대리점들은 회장직을 내놓으라는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88년 설악의 마지막 허가이후 6년간의 밀월은 기존허가샘물회사의 탄탄한 영업망을 구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이후 환경부로 보사부의 음용수관리과가 이관되면서 드디어 '94년 무허가의 낙인을 떨치게 된다. 다만, 샘물회사들은 수질개선 부담금 20%라는 족쇄를 채운 가운데 완전허가를 받아 당시 기존허가업체의 3배 가량의 기업들을 탄생케 했다.
기존허가업체가 미8군 납품으로 시작한 다이아몬드(정진화-유덕재,공동대표)등이 샘물사업만으로 진출한 토종인 들이라면(초창기 다이아몬드 경영에 참여한 인물 중 독립하여 창립한 기업이 크리스탈(윤정호), 이동크리스탈(이병인)이 있다.) 후발기업은 순전히 사회적 바람에 편승하여 타산업에서 변경했거나 주식을 모아 공동투자하는 등, 당시 사회적 변화속에 노다지를 꿈꾸며 탄생한 기업들이다.
하지만 이들 후발기업들은 묘하게도 부도위기를 맞거나 휴업등으로 한차례 이상의 시련을 겪은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정치적 상관관계에 있는 기업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리더음료는 기지개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면서 휴업과 운영을 반복하면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돌샘물은 부도이후 다시 재개하고 있으며 수산음료도 120억원이란 거금을 날린후 재생의 길을 걷고 있다.
이중 가장 짧은 연륜으로 급성장하였다가 돌연 문을 닫고 회사자체가 3번의 경매로 주인이 바뀌면서 현재까지 존재하는 기업이 장수천(現.자연음료)이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한 여인이 결혼해 세번이나 남편과 이혼한 기구한 팔자이기도 하다.
'장수천'의 탄생과 무허가 인생
무허가 샘물의 춘추환란 시대와 맞물려
과거 샘물허가가 수돗물과의 대립적 관계로 보사부에서 허가조건이 동결된 88년이후(마지막 허가14호 업체-설악음료) 샘물사업은 신종사업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허가가 나지 않아 지역마다 소규모로 지하수를 개발하여 무허가로 판매하는 샘물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 무허가 업체들은 자본력을 밑바탕으로 가장 현대식 자동화 시설을 갖추면서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에 20여 회사가 악조건속에 영업을 시작했다.
대표적 기업들이 북청음료(경기도 연천), 경상도에 지리산, 지리산보천, 부산의 신어산, 강원도에 건국수맥, 충청도에 창대, 수산, 미원, 반석, 강화도에 해암, 강원도에 태백, 내설악, 충남에 흑성산, 금산음료, 전라도에 화니백화점, 돌샘물 등이었다. 이들의 사주들은 허가받은 14개업체의 사주와는 달리 자본력이 풍부하고 대부분 고위직이나 다른 사업체에서 탄탄한 경영능력을 지닌 기업들이며, 계열사 혹은 정치적 영향력과 지역유지로서 매우 강력한 유망 기업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허가권만 나온다면 정치적 힘, 자본력, 최신의 기업경영 전략등으로 얼마든지 선발기업과 경쟁력이 있다는 야망에 젖어 있었다.
이들이 설립한 초기 투자금액도 허가업체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30억원에서 7-80 억원이상을 투자, 시설면이나 환경면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기업들이다.(기존허가업체 2-5억내외) 그러나 판매신장이 급성장하여 초기 투자자본을 3-4년이면 회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이들 기업은 정책적 억압과 무허가라는 현실속에 연일 언론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정부의 강력한 대응도 한몫하여 업주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심한 곤욕을 치러야 했으며 무허가 대리점들은 속속 문을 닫고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도 이들은 무허가업체 협의회를 조직, 초대 회장을 건국수맥(당시는 건국재단의 계열사대표-황재춘)이 맡아 연일 항의 시위를 펼치는 등의 강력하고도 극한적 호소 활동을 정치권과 정부에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허가 샘물의 '춘추환란시대'라는 비유가 적당할 듯 싶다.
이런 상황하에 이미 지하수를 개발하여 수질검사를 받았으나 자본이 영세하여 회사규모에 상응하는 시설을 갖추지 못한 반자동의 빈곤한 무허가도 전국에 산재하면서 생산을 하기에 이른다. 이들 영세 무허가 집단은 물이 특색있고 좋다는 곳(충청북도 초정리 일대와 괴산, 경기도 일대, 강원도, 지리산등)에 펌프시설을 설치, 물통을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지하수를 연결하여 한통에 1천원 혹은 2천원에 판매했다.
이같은 무허가 판매는 '95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당시 필자도 환경부와 함께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시설이 조악한데다 타회사(허가업체) 물통에 물만 받아 판매하는 식의 불법판매로 위생안전에 허점이 드러났다. 이때 정부도 샘물사업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법적 테두리에 두어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에 탄생한 영세 무허가 샘물업체가 바로 충북 옥천군 청성면에 위치한 장수천 샘물이다.
장수천 샘물은 김각노씨가 고향 마을에 지하수를 16개공이나 시추하였으나 단 1개공에서 322톤의 물을 취수할 정도로 지역적으로 지하수가 풍부하지 않았다. '93년 지하수개발에 성공한 김각노사장은 '약물탕'이라 구전되어 내려오는 지역 특성을 살려 반자동의 열악한 시설을 갖추고 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웃 주민들에게는 무료로 주었지만 외부인들에게는 20리터 생수통이나 타 샘물회사의 18,9리터 용기 하나당 1000원의 물값을 받아 운영비를 마련했다.
일일수입 60여만원, 월 1천200만원 정도의 매출이었으니 당시로선 소위 '짭짤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수시로 단속에 걸려 벌금을 내면서 당장에 시설비는 마련하지 못하는 악조건 하에 불법판매는 계속되었다. 당시 이같은 불법 판매는 전국에 3-40군데에서 자행되었고, 기존 허가업체들은 이들 불법 판매자들에 대한 불만을 지녔고 강력한 단속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 보건복지부에서 환경부로 이관되어온 수도관리과(당시 음용수관리과)는 샘물사업을 허가해주는 대신에 일년간의 정리기간을 두고 '95년 일제 단속을 펼치게 된다. 이렇게 무허가 업체로 있다가 95년 환경영향평가등을 받아 새롭게 탄생한 기업을 열거해 보면 강화 해암(신스트레이딩), 북청음료(동원에프엔비), 산정오리엔탈, 이동음료(제비울), 동산산업(한국샘물), 작은예수회(기쁜우리샘물), 가평청정, 태백산수(약산샘물), 라이프음료(생그린), 건국샘물, 내설악음료, 오대산샘물(거평식품), 해태음료, 강원샘물, 산들샘, 수산, 선우, 할티, 창대, 주원, 청수, 흑성산(하이트맥주), 오아시스, 대정, 금산, 청수, 명수참물, 시원, 신원, 석정수, 동방, 미륵산샘물, 무학산청(화이트), 신어산, 지리산, 지리산보천, 화니음료등 38개 업체
가 무더기 허가를 받아 샘물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했다.
김각노사장과 장수천, 그리고 노무현
한마디로 김각노사장은 옥천군 청성사람이고 고향에 돌아와 샘물을 팠고 한개공에서 300톤 이상의 물이 나오자 공장을 설립하려 했으나, 자본이 빈약 무허가로 판매하면서 물업계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러나 88년이후 중단했던 샘물허가를 일제히 허가해주면서 ‘먹는물관리법’에 준하지 못한 영세 기업은 무허가로 일제 단속을 피할 수 없었고 이들 회사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여기에 그럴싸한 규모의 공장시설을 구성하려면 최소한 20억원 정도가 소요됐다. 리스자금을 받는다 해도 최소 5-7억원 정도의 현찰이 필요했다. 김각노 사장은 포기할 수 없었고, 리스자금을 얻기 위해 보증인으로 사회인사층인 이성면(김사장과 매제관계) 당시 꼬마민주당 구미지구당위원장을 보증인으로 세웠다.
당시는 해외자금을 저렴한 이자로 빌려주는 시대였고 각 샘물회사들의 증축이나 개보수시설 및 신설사업에 해외자금을 리스를 통해 빌리는 형태였다. 또한 샘물사업이 유망업종으로 분류되어 은행권등에서 쉽게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보증인으로 이성면씨를 세웠고, 연대보증인으로 같은 당원활동을 하는 노무현 현대통령(당시 변호사활동)이 보증을 서게된다. 88년대 청문회스타로 주목받는 인물로 급부상했지만 그는 결국 총선에서 낙마한 후, 변호활동과 함께 민주당원들과 우의를 지니며 생활하던 시기이다. 정치적으로 쓴 고배를 마신 시기였으며 차기를 위한 기반조성도 필요하던 와중에 당시 바람은 샘물사업은 미래의 유망사업이라는 사회전반의 흐름이 강했던 시기로 노무현대통령은 샘물사업에 매력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부산등 경남권에서도 산청군에 지리산, 지리산보천 두회사가 이미 사업을 하고 있었고 김해의 신어산샘물, 기존 허가업체인 고려마운틴 샘물이 연 15%이상의 신장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도 샘물사업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무허가 업체들이 허가를 받기 위해 연고관계인 정치권과 협력하던 상황에서 부산지역은 당시 보사위원장을 지낸 신상우의원등 보사위와 환노위 의원들에게서 샘물은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 였다.
무허가 시절의 국회의원과 샘물사장들
96년 당시 전국의 샘물 분포를 보면 경기 11개사, 강원 7, 충북 12, 충남 6, 전북 4, 전남 2, 경북 1, 경남 8, 그리고 제주와 인천이 각 1개사등, 53개사가 허가받아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국회의원들도 이들 지역의 샘물문제는 골치 아픈 대민 행정으로 인식되어 골머리를 썩혀야 했다. 충청북도 청원군에 밀집된 샘물회사들에 의해 민원야기가 많았던 신경식(현 한나라당의원)의원은 허가 업체, 신설 업체(무허가) 그리고 공장설립반대를 위한 주민대책위의 비등한 여론앞에서 곡예정치를 해야 했던 대표적 정치인이기도 하다.
부산지역에도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당시 보사위원장을 지낸 신상우 의원이 시달려야 했고 보사위와 환노위 의원들은 모두 샘물업계와 논란을 빚어왔다. 경기도의 이한동 의원등도 오리엔탈샘물의 무허가 청산을 심적으로 도와주기는 했으나 현실적 괴리로 어느 국회의원도 앞장서서 해결해 준 인물은 없었다. 무허가 시절의 업체들은 정치권이 가장 든든한 배경이이라면 배경이었다.
워낙 경영이 어려웠던 터라 정치자금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실정에서도 이들은 새로운 시대적 전환점에서 불허가라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고 눈치보기행정의 극치라며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역국회의원들도 이들 사정을 충분히 듣고 지역민원으로 대두되어 장관등 관계관들과 의논해 보았지만 수돗물과의 차별화와 환경파괴라는 환경단체의 압력앞에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일괄적인 행정을 펼치지 못했다.
이런 오랜 갈등속에 기업은 서서히 무너져 가기 시작했고 허가가 나오던 95년경에는 아사(餓死)직전에 몰렸으며 어느 기업주는 허가된다는 언론보도를 듣고 병원에 후송되기도 한 눈물의 샘물사업 역사였다.
노무현대통령의 지난 발자취
노무현대통령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52년생 광주 노씨로 경남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688번지에서 출생, 김해 대창초, 진영중,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17회 사법고시에 합격 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9개월 남짓 생활하다가 78년 변호사 개업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역대 대통령보다 급격한 변화 속에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된 인물로 사회적으론 그다지 많은 조명과 역사적 사건을 접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10여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87년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지내고 88년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제13대국회의원을 부산동구에서 당선하여 입법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88년 국회 5공비리 조사특별위원에서 활동하면서 5공청문회 스타로 급부상하면서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 92년에는 최연소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3월 14대 국회의원으로 출마(부산동구)했으나 낙마하며 정치적 시련을 겪기 시작한다. 93년 10월 사단법인 지방자치실무연구소로 자치제활동을 하면서 95년에는 제1대 부산광역시장선거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96년 4월 15대 국회의원에 지역을 옮겨 서울종로에서 출마했으나 또 한번 낙마한다.
96년 6월 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집행위원, 97년 11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98년 2월 부당노동행위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 98년 5월 새정치국민회의 종로구지구당조직책으로 선출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같은해 7월 낯선 거리 종로구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기필코 당선 낙마 6년만에 국회로 다시 입성한다. 장수천은 바로 이런 혼란과 정치적 방황속에서 연대보증으로 인한 인연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야말로 꼬마민주당의 동지에 대한 의리를 위해 연대보증을 섰고 연대보증 속에 세상물정 모르는 풋내기 사업가로 나서기에는 너무 부담이 컸던 변호사며 정치인으로서, 장수천은 그야말로 혹처럼 그의 마음을 착잡하게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당시 내부적으로는 김각노 장수천 사장과 아우들로 친형제처럼 붙어다니던 홍경태, 그리고 현재 언론에 집중조명을 받고 있는 이광재, 서갑원, 문병욱, 안희정씨등과 사업의 방향을 모색하고 탐구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당시 한국샘물협회장이며 설악음료와 백룡음료를 운영하는 김노식 전국회의원(함께 꼬마민주당 활동)과 당시 프라스틱조합 이사장을 지낸 이국노사장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대통령의 번민 '정리할 수 없는 장수천의 늪'
현실적 혼란·빈약한 경영력 사업 실패의 주요인
결론적으로 사업가로서의 노무현의 '장수천'은 분명 실패했다. 더구나 정치적 입지가 완전한 상태도 아니었고 사업가로 이미 부를 축적한 상태도 아니었으며 변호사와 청문회스타라는 국민적 잣대속에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업을 수행한다는 자체가 너무 벅차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김각노사장은 노무현이 이끌던 장수천에 대해 "노대통령 측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경험이 없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작은 중소기업에 뛰어들어 체계화되지 못한 경영으로 악순환을 걸었었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샘물사업이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어지러운 유통시장과 당시 1-2년 사이에 탄생한 수십 개의 샘물회사들의 과열된 경쟁에 있었다. 빈약한 자본과 유통망 구축이 어려운 '장수천'으로서는 버티기 힘든 현실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 샘물회사들은 자본을 축적할 여지가 없는 상태에서 초기 투자금의 이자를 물어야 했고, 이자만큼 부담이 큰 수질개선부담금(20%)을 내야하는 현실에서 샘물사업은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리스자금등 순전히 남의 자본으로 샘물사업을 하는 도중에 조우한 IMF사태는 이중의 고난이 아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대통령 '장수천'의 태동은 시기적으로 가장 악조건 속에서 출범하여 금전적, 정신적피해를 본 대표적 기업이다.
'98, '99년을 기점으로 부도난 샘물회사만도 금산참물을 비롯하여 수십개에 달했고 일부 샘물회사는 대기업으로 매각되기도 했다(북청음료-동원(100억원), 흑성산-조선맥주(60억원)). 즉, 88년 이후 무허가로 판매하던 샘물회사들을 대부분 lMF 이후 매각, 도산과 길거리 투쟁등 정부와 형평성싸움만 하다가 허가후 2-3년만에 대부분 기업을 정리해야했던 비운의 시절이기도 하다.
이 시기인 ‘97년 샘물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장수천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희망적 발언을 듣기 어려웠다. 노무현대통령은 당시 꼬마 민주당등의 활동을 함께 한 적이 있던 김노식 당시 협회장에게 하소연조의 고민을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리스보증을 서서 사업에 들어 왔지만 주변에서 샘물사업은 의외로 효자노릇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운영을 해보지만 너무 힘이 든다. 샘물허가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OEM도 너무 힘이 든다. 빨리 정리하고 싶은데 정리가 잘 안되고, 출마등 정치적 현안에도 너무 많은 지장을 준다” 고립무원의 사면초가에 봉착한 노무현 대통령의 처절한 당시 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수천 전략의 잘못된 계산
당시 OEM으로 공장설비만 제대로 갖추면 판매를 하겠다던 풀무원샘물과도 설비가 약속한 시점보다 늦어지자 계약이 취소되고 장수천의 운명은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당시 상황을 김각노 사장에게 들어봤다.
"샘물사업의 중요성은 제조도 제조지만 중요한 것은 판매망이다. 그래서 자본을 마련하여 공장시설을 갖추기 전에 판매를 안전하게 대행할 기업을 찾았다. 당시 샘물회사로 상위에 랭크된 기업은 진로, 풀무원 등이었다. 이에 풀무원과 잠정적 사업전략을 세웠고 현 시설을 개보수하여 현대화하면 월30만통을 소화하고 이에 대한 보증금으로 풀무원측에서 주는 20-30억원의 보증금으로 리스자금을 변제, 안정적으로 30만통을 판매하면 월 1억 5천만원의 순이익이 발생된다는 논리였다. 이것이 노무현대통령을 깊숙이 샘물사업에 뛰어들게 한 ‘샘물전략프로그램’이었다"
어려운 유통망에 유명한 풀무원이 앞장서 판매해주고 보증금으로 리스이자를 상환하여 몇 년 운영하면 기업으로서 정상궤도에 오르지 않겠느냐는 극히 소박한 논리였다. 그러나 확실히 노무현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대운은 있어도 경영운은 따르지 않는 듯 하다. 우선 IMF로 인해 1-2년전 만 해도 싼 이자로 시설투자를 했었지만 97년 이후에는 금리가 25%까지 뛰는 고금리 이자로 돌변, 판매 이익금으로 이자를 갚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대기업들이 고액으로 샘물업체를 인수하거나 OEM으로 계약하던 ‘물좋은’ 시절이 끝날 무렵이었고 샘물유통이 지독히도 어지러운 수렁속에 빠져가던 상황이었다.
정치, 사회, 정책적으로 샘물사업은 너무도 힘겨운 분야였다. 청원군에 샘물공장을 설립하려다 주민반대로 실패한 스파클이 포천음료, 대정음료와 손을 잡았고 한국야구르트가 이동음료와, 동원샘물은 북청음료를 IMF이전에 100억원에 인수했으며 풀무원은 길훈식품과 손을 잡은 상태였다. 하이트맥주가 흑성산을 60억원에 인수받았으며 대부분의 기존 샘물업체들이 후발 업체들을 손안에 넣은 상태에서 장수천의 늦은 출범은 악제속에 악제로 등장 도저히 사업전망이 불투명했다. 여기에 주민과의 마찰로 중단했던 금산참물은 결국 문을 닫게된다.
떠돌이가 된 판매회사 금산참물을 운영하던 팀이 새로운 판매회사 (주)삼정을 설립, 이들과 판매망을 갖추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으나 결국 이마저도 ‘98 중부지방 대홍수로 공장에 물이 잠기면서 인연을 맺지 못하게 된다. '97년 7월까지 생산준비를 끝내고 8월부터 생산에 들어갔다면 풀무원과 오랫동안 OEM업체로 생존할 수 있었으나 준공허가가 떨어지지 못해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바로 이 시점이 환경부와 악연의 마찰을 빚은 시기이기도 하다. 준공허가나 환경영향평가등 모든 준비가 완료되는 시점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허가는 약속된 시점보다 2개월 늦은 10월 31일에서야 떨여졌다. 물론 당시 환경부가 관련 금강청등에서도 빠른쪽으로 진행하려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감시공설치, 장기간의 수질검사, 수위검사, 그리고 심사등의 시기를 거치려면 6개월간의 기간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이를 기다리는 사업주의 일원으로 노무현대통령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고 후에 대통령입각후 환경부의 6개 지방청의 지방자치제 이관설도 이와 맥락이 있지 않냐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년의 세월이다. 그는 이미 한배에 올라탄 장수천의 공동 사업가였으며 리스자금으로 어느 경쟁업체에 뒤지지 않는 최대의 고급 시설을 갖추어 설비를 마련하려는 욕심에 모든 자금이 투입된 상태였다. 사면초가의 위기였다. 여기에 '98년 대홍수는 풀무원에 이어 금산참물 판매회사와의 계약도 무산으로 끝나게 했다.

보완 명령 떨어진 '장수천' 환경영향평가보고서
우리나라의 민간 산업 중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허가를 받아 사업을 수행하는 업종은 샘물사업이 대표적이다. 더구나 규모가 중소기업형인데 환경영향평가에 1억원 이상 지출하여 보고서를 받는다는 점은 너무도 큰 족쇄였다. 그만큼 샘물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빚어왔고 시대적 전환점에서 샘물사업은 법이 정한 강력한 제약속에서 사업을 영위해야 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샘물에서의 지하수량은 안전하게 지속될 수 있었다. 즉 사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적정량만 사용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현재 적정 사용량의 규제가 없어 평균 수명이 5년에서 10년을 넘기지 못하는 온천개발 실정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장수천은 당시 엔지니어링 회사 중 가장 많은 연구용역을 맡은 동서엔지니어링(대표 강장신)에게 용역을 의뢰했다.
엔지니어링업계 중에는 신뢰도가 높은 금천엔지니어링, 진보지질등이 있었으나 동서는 덤핑수주 등으로 많은 연구를 한꺼번에 맡다보니 용역내용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 충북도로부터 보완명령을 받게 된다. (당시 샘물환경영향평가는 지방청에서 위촉한 샘물환경평가 심사위원에 의해 심의되었음) '97년 8월 떨어진 보완요구의 주요내용은 (당시 장수천 대표는 홍경태-김각노사장의 동업체제였으나 김사장은 노무현측이 대표를 맡아야 대외적으로 사업확장이 쉽지 않겠냐는 구상하에 대표직을 노무현대통령의 비서였던 홍경태씨에게 위임함) 지하수침투량의 평균값을 재산정하고, 한계취수량의 78%로 과다 산정한 것을 다시금 제시하며, 지하수함양지역과 배출지역을 분석하고 대수성실험, 지구물리탐사 검충, 차수벽 그라우팅, 수질의 안전성, 조사서 작성등 총 42건을 보완하는 내용이다.
이미 샘물 판매와 공장생산량에서 생산량확보가 절실했던 풀무원으로서는 장수천의 탄생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었으며, 당시 업계의 분위기는 '목 좋고 생산시설 좋은' 중소샘물사들의 인수 또는 계약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실정이었다. 당시 샘물환경평가에 대해 많은 샘물사들은 '환경평가가 형식적인 것이 아니냐', '보고서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연구비가 비싸다' 라는 비난을 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하루빨리 보고서를 제출하여 허가를 득해야 하는 사업가로서 노무현 대표는, 여러 창구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했으나 샘물 사업이 수도정책에 어긋나는 미운 오리새끼로서 존재했던 당시로서는 별다른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한계적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샘물사업은 국가정책에 어긋난 사업분야였고 환경영향평가와 수질검사를 통해 강력한 단속권을 정부가 움켜쥐고 있는 상태에서 외부적으로 우수전략사업이라는 평가와 달리 현실적 환경은 매우 열악했던 사업 분야였다. 당시 노무현 대표도 샘물협회 및 주변 업계의 현실에 비해 과도한 수질개선부담금(20%(청량음료), 지하수세 1%) 법에 대한 하소연을 종종 접해야 했다. 그러나 샘물사업이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주범처럼 비춰지고 있던 당시 여론의 비판 탓에 샘물업계 대표들은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고 수출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게 했다. 이 과정에 풀무원과의 계약이 무산되었고 긴급 처방으로 금산참물에서 파생된 (주)삼정과 총판계약을 하는 것으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노무현대통령의 문병욱사장 영입전략
得보다 失, "크게 도움받은 것 없어"
기업리스의 엄청난 이자를 갚아나가기에는 부담이 크고 믿었던 풀무원과의 OEM계약은 무산이 되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썬앤문 사장을 영입하기에 이른다. 당시 강남 금산참물이 세들어 있는 판매창고 옆 2층 사무실에는 갑자기 부산상고 출신 인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순조롭지 못한 샘물사업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금 지원이 필요했고 이에 대해 홍경태씨는 상고 선배인 썬앤문 문병욱 사장을 영입하게된다.(이때 실질적으로 나선 인물들이 김영노, 최도술씨등이다)
문사장은 70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을 거쳐 목욕업계에서 성공했으며 목욕업의 중요수단인 톱밥을 대체원료로 확장했으며 80년대말 호텔업에 뛰어들게 된다. '97년 종합레저그룹인 '썬앤문그룹'을 설립하고 이천시와 인천, 강남호텔등을 경매로 인수하면서 활동범위를 확장해 나가던 문사장에 대해 홍경태씨는 영입전략을 세워 같은 상고 동문인 명수참물 판매회사의 공동대표로 문사장을 영입한다.
당시 명수참물은 공장이 부도를 맞으면서 기존의 종업원들이 전태석 사장과 함께 공동 주식을 만들어 세운 판매회사로 기존의 판매망을 통해 월 5만병정도 판매했다. 즉, 명수참물 (주)삼정도 자본주가 필요했고 여기에 문사장을 영입시켜 활성화한 후 제조사인 '장수천'의 물을 독점 판매하겠다는 사업전략이었다. 이때 금산참물판매 회사의 전사장과 연결지은 사람이 학산지오라이트를 인수하여 샘소슬에서 잠시 대표이사를 지낸 이영노씨다.
전대통령총무비서관을 지낸 최도술씨와 전태석씨가 연고가 된 것은 정치적이라기보다 학산지오라이트를 직·간접적으로 운영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전씨는 금산참물의 영업을 담당하면서 SK그룹 이순석 회장이 독립하면서 차린 금산참물의 영업팀으로 활동, 많은 중소샘물회사들에게 유능한 전문영업팀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 빈약하게 운영하던 학산지오라이트와도 인과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나 금산참물은 무허가논쟁과 공장설립반대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공장 문을 닫게 되었다. 월 15만병이상(10만병이상이면 수익창출)의 매출신장을 올린 금산의 상승곡선이 하향곡선으로 운명을 달리하자 경영팀은 모두 일선에서 퇴진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상황에서 후발주자로 업계에 뛰어든 '장수천'은 IMF와 대홍수로 두 번의 위기를 맞고, 완벽한 시설은 갖추면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대적 위기속에 급히 영업망을 구축하게 된 계기가 (주)삼정과의 총판 계약이었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 전씨는 최도술씨와 함께 종로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노무현씨를 만나게 된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 변호사는 전씨에게 앞으로 '장수천사업'을 잘 부탁한다는 의례적이면서 간곡한 부탁을 한다. 서로의 필요에 의한 만남은 장수천 위기탈출의 유일한 희망처럼 여겨졌다.
다음날 구체적인 계약서를 체결하기로 하고 이들은 제조원과 상표를 모두 장수천으로 하여'오아시스'로 최종 명기, 판매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끝끝내 노무현 대통령의 편에 있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중부지방의 대홍수로 충청권과 경기권 일대 샘물회사들이 침수를 당하였고, 장수천 역시 기계라인에 흙물이 들어차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축한 물량도 없었을 뿐더러 하루하루 판매해야 하는 샘물회사의 생리로서는 '장수천'이 정상 가동되도록 기다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금산참물과 장수천의 인연은 그렇게 막을 내려야 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8일, 충북언론인과의 대화에서 "문병욱 썬앤문그룹 회장은 제 고등학교 후배중에서 서울에서 꽤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이다. 그러나 솔직히 제가 큰 도움을 받은 편도 아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김각노 사장은 이렇게 술회했다. "생수사업의 어려움으로 노무현 대통령 측은 돈 많은 동문 사업가인 문회장을 끌어들였지만 결과적으로 도움은커녕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호텔을 여러 개 경영하고 여기에 샘물을 납품하면서 유통망을 본격화하면 판매수완이 제대로 발휘될 줄 알았다. 그러나 문회장측의 당초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문회장의 실제 재무상태도 열악했다. 판매망도 허술하고 문회장 자신이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문회장은 '장사꾼'이었고 노대통령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모두 사업에는 문외한들이었다.
안희정의 등장 오아시스워터판매회사 설립
풀무원과의 OEM은 허가가 3개월이나 늦어 계약이 성립되지 못했고, (주)삼정과 판매권을 계약하려던 것도 홍수로 인해 파기되었다. 인생 역시 운의 부침이 심하다지만 기업이나 정치에도 이와 같은 '운명론'은 거스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노무현 변호사와 일행들은 '강공법'을 쓰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영업대행에서 자신들이 직접 판매회사를 설립하여 샘물을 판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아시스워터라는 판매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안희정씨가 취임한다. 이즈음에서 장수천 샘물공장은 선봉술씨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판매회사대표직에 안희정씨와 문병욱씨가 5개월간은 어수선하게 자리한 채 헤어지게 된다.
최도술씨는 사무장으로 관리를 담당하고 이때부터는 안희정씨가 전면적으로 나서 협회등의 대외활동에 주력한다. 공장 종업원수는 30여명까지 증가했고 공격적 영업전략은 간만에 청성면 장수천 공장에 활기를 가져다 주는 듯 했다. 제조사로서의 보람과 기업인으로서의 뿌듯한 긍지를 잠시나마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빚으로 운영해온 까닭도 있으나 턱없이 상승한 이자는 그들을 경영의 한계점까지 내몰게 했다.
공장허가 2년 반 동안은 허가, 시설증축, 도로포장, 그리고 홍수복구등 급격한 변화에 시달려야 했던 시기였고 그나마 '오아시스'라는 상표로 시장에 본격적으로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 '00년 단 1년뿐이었다. 월 15만병까지 매출이 급증했지만 결국 안희정씨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리스이자와 이곳저곳에서 융통한 금액의 이자, 그리고 인건비등을 감당할 수 있는 수위를 지나 있었다.
이즈음에 노무현변호사는 프라스틱조합을 찾아가 진지한 조언을 구하게 된다. 물론 여러 경로를 통해 사업방향을 모색해 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이국노 전조합 이사장에게 조언을 듣게된다. 이 자리에서 이국노 전이사장은 "조합에서도 북한샘물을 수입하여 판매해봤다. 그러나 샘물의 주원료인 물은 지하수에서 얼마든지 나오고 용기만 필요하다. 하지만 용기를 비롯하여 부대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따라서 용기 관리와 회수를 잘해야 한다. 용기는 순전히 자본력이다. 아울러 영업망과 유통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장수천은 적은 자본으로 유통망 경쟁에서 도저히 승산이 기대할 수 없었다. 분명 샘물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오아시스'와 같은 사업이 아니었다. 길고 긴 4년 간의 현장실습은 막대한 자본과 정신적 대가를 요구한 나머지 정치적 맹점, 그리고 노무현 인간 개인의 정신적 철학에 어긋난 채 아물지 못하는 상처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노무현대통령의 心中, 그리고 피말리는 사업가
노무현대통령이 지금으로부터 8년전 샘물사업을 시작한 것은 시대적 배경으로 충분히 관여될 수 있는 세태와 환경에서 출발하였다. 부산으로, 서울로 지역을 옮겨가면서까지 시도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국민은 청문회의 스타로 인지하는데 그쳤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변함 없는 의리와 미리 준비를 갖춰야 할 총선 자금 확보에, 당시 샘물사업이 떠오르는 유망사업으로 세간에 퍼져 있었다는 점등은 무모한 사업가의 두뇌에서는 확실히 건져 올릴 수 있는 매력 있는 사업으로 비춰질 만 한 것이었다.
사업전망에서도 판매는 풀무원에 위탁하면 영업은 무리가 없고 시설자금은 리스자금으로 충당하면 큰 자본 없이도 충분히 해볼만한 일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장수천은 이름과는 달리 결과적으로 단명(短命)해야 했다. 초기 설립자 선봉술씨에서 워터코리아의 신남철씨로, 현재는 수산음료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자연음료의 김영우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가 있다.
OEM을 위해서는 기일내에 시설과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환경영향평가는 그보다 2개월이 늦은 후에 떨어졌고 그때는 이미 OEM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금산참물과의 판매권대행계약을 하루 남긴 밤에는 집중호우로 공장을 가동 못해 계약마저 할 수 없었던 장수천. 그 누구였더라도 당시 기업인이라면 이 피 말리는 고통 속에 법을 우회해서라도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을 것이란 짐작을 가능케 한다.
당시 장수천 공장지역에는 도로가 제대로 개설되지 않아 5억원을 투자 도로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 노무현씨는 지역에 혹여 피해를 끼치거나 자칫 정치적 휘말림에 싸돌지 않을까 무척 고심한 흔적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당시 관할 옥천 군수는 노무현씨 덕분에 도로가 개설됐다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사실 많은 샘물회사들은 산간벽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제대로 된 도로는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정이 이러하여 어느 기업은 도로포장에만 10억원 이상 탕진하기도 한다. 여기에 전기시설등의 기반시설을 갖추는데만 20억원 이상이 투자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노무현씨의 천직은 정치인이었지 사업가는 아니었다. 동료와 선후배, 그를 믿고 따르는 '노무현맨'들이 달려든 장수천 사업은 결국 5년만에 설비비 2억원과 공장 및 부지 2억2천만원등을 포함하여 4억원 정도에 경매에 붙여진다. 그것도 충북도에 의해 경매로 넘어갔다.
세번의 경매로 주인이 바뀐 장수천의 기구한 운명
현재 장수천은 자연음료로 사명이 교체되었고 경영주 또한 '노무현 사단'에서 엄연히 김영우 사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음료'는 장수천의 그림자에 휩싸인 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장수천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을 되뇌어 보자. 선봉술, 신남철, 김영우, 안희정, 최도술, 문병욱, 이영노…. 이들은 투자가 혹은 사무직에서 판매회사 사장으로 제각기 목소리를 내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보람과 꿈은 무너졌다. 노 대통령의 당신 심경은 정책의 일관성, 그리고 주도면밀하고 대민 봉사적 입각에서 행정을 펼쳐줄 것을 생각했으리라. 국가는 정치적 논리와 함께 행정과 기업이 함께 공생해야 한다. 하루 10톤 정도도 생산하지 못하던 장수천. 이제 정치적 논리에서 벗어나 활기찬 특성 있는 샘물업체로 다시금 다가가야 한다.
현재 공장은 하루 3-4시간을 가동하면 기계를 멈춰야 하는 고사직전의 운영을 통해 근근히 생존하고 있다. '장수천' 물맛을 원하는 기업도 굳이 그들과 손잡으려 하지 않는다. 현 시국에 휘말려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다. 지하수를 시공하여 때로는 공동대표로, 다시 일선에서 물러나 장수천의 영업본부장으로, 그리고 지금은 그토록 공을 들였던 ‘장수천’을 다시금 건전하게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김각노 사장.
현재 장수천(자연음료)은 수산음료계열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너무 힘든 사회적 혼돈 속에 애꿎은 한 기업은 또다시 사회적 돌팔매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당하고 있다. 기업은 기업경영전략에 의해 힘을 겨뤄야 한다. 정치적 휘몰이는 그들에게 무용지물이다. 샘물업계의 전반적인 경영불황과 맞물려, 이처럼 '고난의 시절'을 걷고있는 '장수천'등의 많은 샘물회사들이 제자리를 찾아나가는 내일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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