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사고로 연간 2,100명 사망
지난 1월 15일 청주 소재 LCD 제조업체에서 불산 8%, 황산 13%, 물 79%의 혼합액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는가 하면, 2월 18일에는 SK이노베이션 청주공장에서 근로자 2명이 휘발성 액체인 가스를 흡입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 3월 5일 (주)구미케미칼에서 염소가스 유출사고가 발생한 데 이어 3월 22일 SK하이닉스 청주공장에서 염소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LG실트론 구미2공장에서는 불산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한 지 20일 만인 지난 3월 22일 또다시 불산, 질산 등이 혼합된 혼산액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근래 들어 화학사고가 많이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화학사고는 지금까지 빈번히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화학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만 1년에 2,100명. 막상 사고가 발생해도 발생업체에서는 이를 쉬쉬하기 바쁘며 국민 역시 그 심각성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년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화학사고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관심을 갖게 됐다.
염소가스 누출사고 1967년부터 꾸준히 발생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수돗물을 소독하는 염소가스의 경우 그 위험성이 상당해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가스안전공사 자료에 의필요하면 염소가스 누출사고는 1967년부터 최근까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저농도의 염소가스를 흡입할 경우 통증과 각종 증상을 동반하지만 고농도의 염소가스는 수분 내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염소가스 누출사고는 미국, 중국 등에서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어 국제적으로 사용을 제한하는 추세다.
문제는 이렇게 위험한 물질임을 알면서도 이를 규제할 마땅한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불산가스는 공기보다 가벼워 누출 시 공기 중으로 날아가지만 염소가스는 무겁기 때문에 누출 시 이를 수습하는 것부터 어려움이 크다. 또 화학공장에서 발생하는 사고뿐만 아니라 운송, 보관, 사용상의 위험성까지 고려해서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만 국내에서 이를 연구하는 학자 또한 얼마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특히 이러한 화학공장은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 경기, 인천과 같은 수도권에도 많이 위치해 있다. 만약 수도권 한복판에 테러가 발생해 화학물질 공장이 폭발하게 된다면, 그때의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안전은 ‘마라톤’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편, 지난 3월 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유승우 의원실, 한정애 의원실의 공동주최로 개최된 ‘화학사고 대응체계의 입법·정책적 개선방안’ 세미나에서는 화학물질 사고에 대응하는 여러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됐다. 이날 세미나에는 문일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의 발표를 비롯 민경석 불산사고 민·관합동 환경영향조사단장, 권순경 소방방재청 소방정책국장, 송형근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관실 국장, 이양수 SK이노베이션 전무, 김경민 국회입법조사처 환경노동팀 입법조사관의 토론이 있었다.
이날 축사에서 유승우 의원은 “화학물질 사고로부터 안전을 담당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정애 의원은 “제도가 제도로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책임지는 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며 “모든 부처가 우리 업무라고 얘기하지만 해당 제도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체크되고 있는가와 사고가 발생해도 실질적으로 살펴보고 보완할 수 있는지 논의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일 교수는 “안전은 마라톤이다. 하루 잘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며,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문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살았던 나라인 네덜란드에서는 직물을 주로 거래했는데, 질 좋은 직물을 판매하기 위해 직물조합 관리감독들이 지속적으로 모여서 우수한 제품을 유지했던 것이 비결”이라며 “안전 역시 이렇게 해야 한다. 안전에 대해 전문가들이 모여서 꾸준히 논의하고 생각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며 안전을 관리감독할 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화학공장-대형화·복잡화·노후화
사고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
문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0년 기준 세계 화학시장 점유율 세계 6위로 ‘화학강국’이다. 국내 주요 수출 품목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반도체, 기계가 아닌 석유제품이며 세계 주요 정유공장 규모를 살펴보면 SK에너지, GS칼텍스가 2위, 3위를 차지한다. 또 국내에서 유통되는 화학물질만 4만 1,000여 종에 달하고 연간 400여 종의 신규화학물질이 생산된다. 특히 국내 화학물질 생산 공장은 대량생산과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굉장히 대형화 돼 있는데 그만큼 내부가 복잡하다. 이러한 화학물질 공장들은 대부분 울산, 여수, 대산 등에 모여 있으며 1960~1970년대에 건축된 공장으로 지어진 지 이미 50년 가까이 됐다. 즉 대형화, 복잡화, 노후화로 사고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며, 지금이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할 시기다.
국내 근로자 10만 명당 산재사고 사망률이 11.4명으로 영국과 비교했을 때 무려 16배에 달하며, OECD 국가 평균 꼴등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KOSHA)을 설립하고 공장안전보고서(PSM)를 도입했는데, 이후 산업재해 발생률이 급격히 떨어졌지만 최근 10년간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문 교수는 “현재 화학물질 안전은 고용노동부, 환경부, 안전행정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관이 부처별로 독립해서 관리하는데 여기에는 그만큼의 한계가 있어 이를 통합할 필요가 있다”며 “화재사고는 물리적 대응을 하면 되지만 화학사고는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에 전문가를 육성하는 제도 역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작년에 사고예측, 그러나 아무도 관심 안 가져
화학물질 사고와 관련,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발생회사에서 쉬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양성화 시켜서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 교수는 작년 여름 前 지식경제부 산하 프로젝트를 맡아 전체 분야의 안전점검에 나선 적이 있다고 한다.
“점검 후 제일 시급한 것 중 하나가 유독물질 관리였고 그때 이미 사고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유독물질의 양이 적어서 정부보고도 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회사가 많았고, 사고가 나더라도 단순 폐기해버리는 등 문제가 심각했다. 그리고 작년 9월부터 계속해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 교수는 “전문가는 사고를 예측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실질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구미에서 발생한 불산누출 사고와 비슷한 시기에 독일 하노버에서 유독가스(질산 1,400ℓ)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비교해보면 독일은 사고 발생 즉시 1,0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됐으며 이중 화학사고 전문가가 100명이었던 반면 우리나라는 소방관 및 경찰관 350여 명이 전부였다. 또 현장 보호장비 역시 독일은 전원이 보호복을 착용하고, 1인당 최대 20분 작업 후 교대한 반면 우리나라는 보호복 6벌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2벌은 오래돼서 4벌을 입고 지칠 때까지 사고를 수습해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신고 2시간 만에 최고 경보를 보냈고, 24시간 안에 모든 수습이 마무리돼 사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고발생 12일이 지난 후에 재난지역을 선포하고, 2달이 지났을 때에도 완벽하게 처리되지 않은 채 5명이 사망했다.
화학사고 대응 위해 현장조정관·조사기관 필요
이러한 화학물질사고 대응을 위해 문 교수는 2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제안에 앞서 지금까지 발생한 화학사고들이 어떻게 하면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첫 번째로 현장조정관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화학사고 발생 시 대응단계에서 사고 현장을 지휘하는 관계가 모호한 만큼 현장조정관이 지휘권을 갖고 재난대응 활동을 지휘·통제해야 한다.
두 번째로 국가적인 화학사고 조사기관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발생한 사고에 관련된 보고서를 살펴보면 2~3페이지 분량으로 사고의 정확한 원인과 과정, 대응 등에 대해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고 재발방지를 위해 제대로 조사해야 하며,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공유하고 잘못이 있으면 제도를 개선하는 등의 사고조사가 필요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CSB(Chemical Safety and hazard investigation Board)라는 기관이 있다. CSB를 통해 사고 발생 시 독립적으로 사고조사를 시행하며, 2~3년에 걸쳐 오랜 기간 연구하고 누가 잘못했느냐보다 사고의 원인 파악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사고가 왜 발생했으며, 경영자는 무엇을 했는지 원인을 밝혀야 비슷한 사고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도 ‘국가화학사고조사위원회(가칭)’라는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직속위원회로 조직돼야 독립적인 역할을 해낼 것으로 보이며, 일정 자격을 갖춘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되고 지속성 및 안전성 향상을 위한 상설조직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기관이 설립될 경우 유사사고 방지를 위한 근본적 원인 분석 및 대책을 수립할 수 있으며, 부처 간 이해효과를 넘어 범정부적 차원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를 조사, 분석 및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물질전문가 아닌 ‘안전전문가’ 나서야
이날 토론에서 민경석 교수 역시 “실제 현장에서 총괄하는 전문가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며 “각 부처에서 철저하게 관리·감독할 수 있는 인력 조직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지자체보다는 중앙정부에서 맡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권순경 국장은 소방방재청에 수사전담기관을 설치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동의하며 “초동조치를 통해 피해확산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송형근 국장은 “화학사고 대응을 주관하는 부처는 환경부”라고 역설했다. 이어서 그는 “작년 10월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대책을 만들었고, 핵심은 사고 발생 시 주관을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었다”며 “사고 발생 시 해당물질을 담당하는 부처가 주관하고 중복되거나 불분명할 경우 환경부가 주관하되 지원이 필요할 때는 다른 부처가 하는 것으로 결정됐으며, 사고에 대해 전반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지휘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양수 상무는 “한 번 일어난 사고는 다시는 재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경민 입법조사관은 문 교수의 주장에 대해 “현장조정관이 꼭 화학물질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고 반문하며 “사고전문가와 화학전문가는 다르다. 물질에 대한 대응이 아닌 위험성에 대한 대응이 더 중요하며, 물질전문가가 아닌 안전전문가가 나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해화학물질 안전 1단계 대책 발표
이러한 화학물질 사고 예방과 대책마련을 위해 지난 3월 6일 김동연 신임 국무총리실장 주재로 관계 차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교육과학기술부, 환경부, 고용노동부 차관과 소방방재청장, 산림청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정부는 전국에 있는 모든 유해화학물질 취급사업장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해 안전 취약요인을 분석하고 사업장을 등급화해 관리하기로 하는 유해화학물질 안전 1단계 대책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현재 등록제로 운영되고 있는 유독물 영업을 허가제로 전환하고, 위험성이 큰 작업에 대해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간 공동책임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또 중소기업 등 사고 취약부문에 대한 안전교육 등의 지원을 강화하고, 지자체로 이양한 유독물관리 권한을 지방 환경청으로 환수하며 사업장 안전관리 실태 불시점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일정기간 내 관련 법규를 연속 3회 위반하는 경우 영업을 정지하거나 사업장을 폐쇄하는 등의 삼진아웃제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계속해서 발생하는 화학물질 사고. 정부도 이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 문제를 개선하고자 여러 전문가, 담당자들을 한데 모아 대책을 강구하는 자리를 여럿 마련해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논의시점이 많이 늦은 것은 사실이나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이라도 계속해서 대안을 마련하고 대책들을 실행한다면 사고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사고를 예방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점차 늘어나는 화학물질의 사용량과 더불어 성장하는 화학물질시장 속에서 선두를 달리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안전’에서 선두를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번 일들을 통해 우리나라가 ‘안전 분야 꼴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안전선진국’으로의 한발을 내딛는 국가로 발전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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