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곶자왈, 갈등에서 공생까지

생존의 틈새에서 살아남는 법 가르쳐
온라인팀 | eco@ecomedia.co.kr | 입력 2016-08-05 13: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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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을 들어본 적 있는가. 온통 흙 한줌 없는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곳에 나무와 덤불이 우거졌다는 제주도의 숲, 그 곶자왈 말이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곶’과 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친 합성어이자 고유 제주어이다.


△곶자왈에서 서식하는 노루

곶자왈에 이루어진 무성한 식생 밑에는 놀랍게도 흙이 한 줌도 없고 딱딱한 현무암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땅이라며 사람들에게 버림받던 곳이 곶자왈이고, 땔감을 구할 때나 소와 돼지를 방목할 때 드나들던 곳이 곶자왈이다.

내가 방문한 환상숲 곶자왈 공원도 마찬가지였던 곳이다. 이곳 해설사 분들의 설명에 따르면 기성세대에게 홀대 받던 곶자왈은 과거에 평당 300원에 거래될 정도로 가치 없는 땅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화장품 CF, 영화, 화보 촬영지로 떠오른 환상숲 곶자왈공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은 개인이 숲을 정원삼아 가꾸다가 점점 유명해지면서 숲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곶자왈은 흙 한 줌 없는 현무암지대 위에서 식물들이 개척해 나간 곳이다.

환상숲 곶자왈 공원도 여느 곶자왈과 마찬가지로 30~40년 주기로 인위적인 천이과정을 겪은 숲이다. 바위땅 위에 덤불이 자라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던 곳에 점점 나무가 우점하여 가시덤불이 사라지며 ‘곶’이 되면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서 땔감으로 쓰고, 나무가 베어지고 햇빛이 드는 자리는 덤불이 다시 자라서 ‘자왈’이 됐다가 다시 ‘곶’으로 변하고, 곶-자왈-곶-자왈을 반복하다가 곶자왈의 가치가 인정돼 곶자왈은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됐다. 그리고 학자들이 ‘곶’과 ‘자왈’을 합쳐서 '곶자왈'로 통칭하게 이르렀다.

△제주도 곳곳에 퍼져있는 곶자왈은 제주도의 약20%를 차지하는 귀중한 곳이다. 그러나 현재 곶자왈 전체 면적 110㎢의 20.8%인

  22.9㎢가 개발행위 등으로 훼손됐다.<사진제공=한라일보 2016.05>


곶자왈은 어떤 가치를 인정받은 것일까?
우선 현무암지대라서 늘 수자원이 부족한 제주도에서 스펀지 역할을 한다. 곶자왈에는 크고 작은 암괴들이 두텁게 쌓여 있어서 비가 오면 빗물이 그대로 지하암반으로 흘러들어서 맑고 깨끗한 제주의 지하수를 저장한다. 곶자왈은 화산 폭발을 겪으면서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암괴로 쪼개지면서 분출되어 요철(凹凸)지형을 이루며 쌓여있기 때문에 지하수 저장은 물론, 보온과 보습효과를 동시에 가져와 열대식물이 북쪽 한계지점에 자라는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식물이 남쪽 한계지점에 자라는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라고 전문가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곶자왈에서 서식하는 열대식물 풍란.
△곶자왈에서 서식하는 한대식물 바위솔.

앞에서 말했던 과거 곶자왈 내에서 이루어진 인위적인 천이과정의 증거가 있다. 현재 곶자왈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곳으로 변한 만큼 이곳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보물처럼 귀중히 여겨진다. 그래서 더 이상 벌목을 하지 않는데, 밑동만 굵고 위로 뻗은 가지들은 깡마르고 빽빽하게 여러 갈래로 올라왔다. 놀랍게도 이 나무 뿌리는 수백 년 동안 살았다. 나무들도 쉽게 죽지 않으려고 애썼는지 밑동이 잘려나가면 더 많은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내어 가지를 자르는 사람들에게 조용하게 있는 힘껏 저항했다.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자라난 나무는 곶자왈에서 흔한 형태의 나무이다. 만약 지난 세월동안 잘리지 않았더라면

  아름드리 굵고 큰 나무가 됐을 것이다.


그 힘은 실로 대단하다. 제주도는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고 곶자왈은 부드러운 흙 한줌 없이 단단한 암석 위에 생성되었기 때문에 모두 뿌리가 두터운 근육질이다. 그것이 힘의 원천이었을까. 나무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현실적이지 않은 듯하다. 나무들의 생김새가 우리들이 아는 모습과는 상반돼 있다. 우리가 알던 곧게 뻗은 줄기의 소나무도 이곳에서는 볼 수 없다. 흙에서 받을 양분이 부족하다 못해 없으니 햇빛 한 줌 더 받겠다고 곶자왈의 나무는 더 높이, 가지를 더 많이 뻗어내고 가지들은 나무 종류를 불문하고 구불구불 엉켜있다. 소나무도 모양새를 챙길 틈이 없었는지 굵은 가지가 여러 개로 뻗어있다. 햇빛을 아주 많이 받아야 하는 극양수림 중 하나인 이 소나무는 결국 나무들의 기세에 짓눌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곧 쓰러지게 될 것이다.


△현무암 위에서 더욱 다부지게 자란 나무 뿌리와 그늘에서 죽어가는 소나무.

하지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곶자왈 뿐만이 아닌, 당신이 사는 뒷산을 포함한 모든 숲에서 이러한 천이과정은 일어나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며,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 또한 없으니 말이다. 또 다시 특정 종류의 나무가 한 자리를 우점할 즈음에는, 덩굴이 조여 올라오거나 다른 나무들의 싹이 더 치열하게 올라와서 그 나무들을 쓰러뜨릴 것이다. 소나무 같이 높이 자랄 수 있는 교목들은 그렇다. 

키가 대부분 5m 이상 자라지 않는 관목이나 소교목들은 어떨까. 이들은 처음에 곶자왈의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햇빛을 더 받으려고 경쟁했으나 교목이 자라는 속도에 못이겨 결국에는 햇빛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갑자기 엄청 자랐다가 성장을 멈추게 돼서 가지 힘이 약해지니 이 나무들 특성에 맞지 않게 덩굴처럼 변한 것도 있다. 이들이 선택한 길은 종자를 하나라도 더 많이 퍼뜨려서 자손을 더 많이 남기는 방법이다.

소교목에 속하는 구지뽕나무도 여느 관목과 마찬가지로 씨앗 들어있는 열매 한 송이, 햇볕 조금이라도 받을 잎 한 장이라도 더 지키려고 한다. 이 구지뽕나무의 허리 쯤에는 가시가 아래를 향해 예리하게 돋아있다. 그런데 그 밑으로도, 그 위로도 가시가 돋아있지 않고 딱 한 곳에만 돋아있다. 이 나무는 위에 달린 잎이나 열매를 땅으로부터 기어오르는 누군가로부터 보호하려고 가시가 이렇게 돋은 것이다. 바로, 땅에서 기어 올라가는 애벌레로부터 지키려는 것이다. 옆에 있는 다른 나무는 조금 다르다. 나무가 제법 높고 애벌레도 기어 올라가서 높은 곳의 열매를 먹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나무도 특정 위치에만 가시가 돋아있다. 이런 나무의 가시는 내가 손을 뻗으면 만져지는 곳에 정확히 가시가 만져진다. 이 나무는 나 같이 손을 뻗어서 열매를 따 먹으려는 사람이나 말과 소 같이 나무를 타고 올라서 열매를 뜯어 먹으려는 이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정도 높이에 가시가 돋아있다. 이 나무도 구지뽕나무이다.

△구지뽕나무의 가시들.
 
굳이 숲에 어떤 나무가 사는지 이름을 다 외우는 것만이 식물을 사랑하고 산을 사랑하는 것일까.
지식을 높이 쌓을 필요가 있을까. 산을 오른다는 것은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닌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런 목적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왜 곶자왈의 소나무는 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었는지, 구지뽕나무의 가시는 무슨 이유로 삐죽 튀어 나왔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숲을 사랑하는 방법일 것이다. 식물들에게 극한의 땅이었던 곶자왈은 그런 사랑이 가능한 숲이다.

한 가지 지나친 나무가 있다. 바로 갈등(葛藤). 갈(葛)은 칡이고 등(藤)은 등나무이다. 오른쪽으로만 타고 오르는 칡과 왼쪽으로만 타고 오르는 등나무. 둘 중 하나가 상대를 더 조이면 하나가 살아남지만 결국 밑에서 또 다른 하나가 올라와서 새로운 갈등이 형성되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갈등에 휩싸여 있던 소나무, 때죽나무는 숨통이 조여와서 죽고 만다. 환상숲도 5년 전까지는 그런 갈등의 덩굴을 인위적으로 제거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나무, 때죽나무만 소중했던가? 그 갈등 덕분에 나무 껍질에 붙어서 수분을 유지해가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콩짜개덩굴은 갈등이 잘려 없어지면 점점 말라 죽어갔다는 것이다. 갈등이 누군가에게는 숨통을 조여오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물 한 모금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곶자왈에서 배워간다.

△나무나 돌에 붙어서 사는 콩짜개덩굴.

어쩌면 공생을 하는 방법은 갈등일지도 모른다. 칡과 등나무가 감고 올라가서 나무가 쓰러지게 되면 그 자리에는 햇살이 들어와서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다시 갈등이 형성되면 돌 바닥에서 그 갈등을 보고 있노라니 목이 매이는 콩짜개덩굴이 목을 축이고 나무는 또 다시 쓰러지고. 숲은 늘 그대로일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런 숲을 보면서 공생한다고 한다.

갈등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숲 속 같은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은 중심을 잡아주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주고, 한 사람은 굳어져 가는 신념과 관념에 도전하고 비판하는 갈등이 되어주고, 한 사람은 그 갈등에 집중해보는 콩짜개덩굴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생의 개념이 아닐까.

숲이 이렇게 순환하면 비로소 우리는 그 숲을 보고 '살아있는 숲'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갈등을 애써 외면해 본 적이 있었을 테지만, 결국에 그 갈등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공생이라는 것과 살아있는 사람, 살아있는 어른으로 자란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내게 다가오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커다란 곶자왈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에게 공생이란 무엇인가, 아름드리 큰 나무? 아니면 칡과 등나무 사이? 아니면 콩짜개덩굴? 곶자왈의 나무들에게서 공생을 배운다. 
<그린기자단 권순호/ 이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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