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 공론화위원회가 주최한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시민의 선택’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사회가 어떤 탄소감축 경로를 택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이번 공론화는 헌법재판소의 탄소중립기본법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마련된 숙의 절차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순한 정책 홍보나 여론 수렴을 넘어, 시민과 미래세대가 직접 기후위기 대응의 원칙과 부담 분담, 감축 속도를 논의하는 장으로 기획됐기 때문이다. ‘50인 회의’는 이번 프로젝트를 2026년 세 번째 공론화로 제시했고, 논의 과정은 KBS를 통해 생중계됐다.
헌재 결정 이후 본격화된 기후 입법의 시간
이번 공론화에는 성별·연령·지역 분포를 고려해 선발된 300명의 시민대표단과 초등학교 5·6학년 및 중학생으로 구성된 40명의 미래세대 대표단이 참여했다. 서울 KBS 본사를 비롯해 대전·대구·광주·부산 등 전국 권역이 연결됐고, 실제 현장 출석 인원은 350여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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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한 전문가들과 시민들(화면캡처) |
이번 공론화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2024년 8월 헌법재판소의 탄소중립기본법 헌법불합치 결정이 있다. 헌재는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도 2031년 이후의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경로를 법률에 명시하지 않은 점이 국민의 기본권, 특히 미래세대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기후정책이 더 이상 행정부의 계획 차원에 머물 수 없으며, 국회가 중장기 감축 경로를 보다 명확하게 입법화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졌다.
국회 측은 기후위기를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산업·에너지·무역·일자리·외교를 아우르는 구조적 전환 과제로 규정했다. 폭염과 집중호우, 가뭄, 산불, 해수면 상승 등 기후재난은 이미 시민의 일상과 지역경제를 흔들고 있으며, 유럽연합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글로벌 공급망의 탈탄소 요구, ESG 공시 확대는 기후 대응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결국 이번 공론화는 탄소 감축 목표를 둘러싼 입법 논의를 시민의 숙의 과정과 연결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2031년 이후를 비워둘 수 없다…법·과학이 던진 경고
전문가 발제에서는 법적 공백과 과학적 경고가 함께 제시됐다. 김태호 한국환경법학회 회장은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 논의가 교토의정서와 녹색성장기본법, 탄소중립기본법으로 이어져 왔지만, 정작 2031년부터 2049년까지의 구체적 감축 경로는 비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헌재가 2030년까지 40% 감축 목표 자체를 위헌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 경로를 비워 둔 점을 문제 삼았다고 설명했다. 지금 충분히 감축하지 않으면 미래세대가 훨씬 더 급격하고 무거운 감축 부담을 떠안게 되는 만큼, 법은 부담의 전가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실효적인 감축 경로와 속도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현실도 엄중하게 제시됐다. 정태성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연구관은 인간 활동으로 인해 지구 평균기온이 이미 산업화 이전 대비 0.8~1.3도 상승했고, 최근 10년 한국의 상승 폭은 약 1.1도로 세계 평균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후위기가 단순한 평균기온 상승이 아니라 폭염과 홍수, 가뭄과 같은 복합재난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농업 생산과 식량 가격, 지역경제와 국가경제에 연쇄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기후피해는 모든 지역과 계층에 똑같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감축뿐 아니라 적응 정책 역시 우선순위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래세대의 요구는 분명했다…“조기 감축이 가장 공정하다”
이번 공론화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목소리는 미래세대 대표단의 문제의식이었다. 서울·대전·대구·광주·부산의 미래세대 대표단은 세 가지 감축 경로 가운데 ‘조기 감축형’을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꼽는 의견을 잇따라 내놨다. 지금부터 빠르게 줄여야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 수 있고, 지연 후 후반에 몰아서 감축하는 방식은 현재 세대의 편의를 위해 미래세대에 비용과 위험을 떠넘기는 구조라는 인식이 공통적으로 제시됐다. 대구 대표단은 조기 감축이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적고 사회·경제·환경 전반의 효과가 크다고 평가했고, 광주 대표단은 후반 집중형이 결국 미래세대에 더 큰 부담을 안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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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분담에 대한 인식도 분명했다. 미래세대 대표단은 “기후위기를 만든 책임은 현 세대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자신들도 일상 속 실천을 통해 책임을 나누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들은 감축 계획이 공정성과 형평성, 실행 가능성, 비용, 효율성, 세대 간 협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부산 대표단의 “어른들은 더 큰 경제적·정책적 책임을 갖고 시스템을 바꾸고, 미래세대는 일상에서 적극 실천하겠다”는 발언은 이번 공론화가 단순한 세대 갈등이 아니라 책임의 비대칭성과 역할 분담을 둘러싼 논의였음을 보여준다.
기술 낙관론의 한계와 한국 감축 경로의 모순
전문가들은 미래세대의 문제제기에 상당 부분 공감하면서도, 기술 발전만으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에는 선을 그었다. 질의응답에서 전문가들은 미래 기술이 중요하긴 하지만, 현재 배출을 줄이지 않은 채 나중에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접근은 불확실성이 지나치게 크다고 설명했다. 이미 활용 가능한 저탄소 기술을 조속히 확산시키는 동시에 장기적 기술 개발에도 투자해야 하며, 결국 강력하고 일관된 정책 신호가 기술 혁신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감축 경로는 기술 가능성만이 아니라 미래 탄소가격과 국제 규제, 시장 변화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또한 기업의 기술 혁신에 공적 자금을 투입할 때, 그 성과를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미션 지향적 혁신' 모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화석연료 기반 일자리가 사라지는 곳에 안전한 전직 경로를 마련하고, 위험의 외주화가 재현되지 않도록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현재 감축 경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현행 제도가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만 법제화하고 있을 뿐, 실제 정책은 2028~2030년 사이 국제감축과 탄소포집·활용·저장기술 등에 과도하게 기대는 지연형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목표는 제시돼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이행 정책과 제도는 충분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한국이 ‘후반 집중형’에 가까운 경로로 가고 있다는 평가다.
산업 전환·지역 형평성·에너지 체계
시민대표단의 질문은 감축 경로를 넘어 산업 구조와 지역 형평성, 생활 속 배출, 에너지 체계까지 확장됐다. 전문가들은 국내 산업 중 철강의 배출량이 가장 많고, 석유화학과 시멘트가 뒤를 잇는다고 설명했다. 다만 최근 철강 배출 감소는 구조적 전환의 성과라기보다 경기 부진에 따른 생산 감소의 영향이 크다고 진단했다. 시민 생활 측면에서는 교통뿐 아니라 건물 에너지와 폐기물도 중요한 배출원으로 꼽혔고, 전기 절약과 대중교통 이용, 재활용 확대 같은 일상적 실천 역시 감축과 직결된다고 강조됐다.
지역 간 형평성 문제도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전문가들은 전기를 생산하면서 환경 부담을 감수하는 지역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지만 생산하지 않는 수도권 사이의 불균형을 언급하며, 비용과 책임을 보다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후피해가 지역별·계층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만큼, 감축 비용과 전환 부담 역시 획일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산업 전환과 관련해서는 단순 규제나 강제만으로는 해결이 어렵고, 피해 업종과 노동자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이 거듭 강조됐다.
에너지 체계와 배출권거래제 역시 공론화의 핵심 쟁점이었다. 석탄발전을 줄이면서 탈원전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재 전력 수급 구조와 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를 고려할 때 일정 수준의 원전 활용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배출권거래제와 관련해서는 기업들이 예상 배출량을 크게 잡아 총량이 커질 경우 가격이 떨어질 수 있고, 한국은 여전히 대부분의 배출권을 무상 할당하고 있어 제도 실효성 논란이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감축 목표를 강화해 배출권 총량을 줄이고, 장기적으로는 유상할당 확대와 세수 환류 방안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나왔다.
공론화의 성과와 한계…산업계의 실제 목소리는 희미했다
이번 공론화의 가장 큰 성과는 기후위기 논의를 더 이상 환경 의제에만 가두지 않고 세대 간 정의, 산업 전환, 지역 형평성, 경제성, 정책 실효성 문제로 확장했다는 데 있다. 미래세대는 조기 감축과 현 세대의 더 큰 책임을 분명히 요구했고, 시민대표단은 감축의 비용과 기술, 전력 수급, 제도 설계의 현실을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전문가들도 조기 감축이 쉽지 않은 길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 지연 후 후반 집중형 경로는 기술적·정책적·국제적 측면에서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의는 한국 사회가 어떤 감축 경로를 선택하고 그 부담을 누구와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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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계도 뚜렷했다. 조기 감축의 필요성과 미래세대의 권리, 정책 설계 원칙에 대한 논의는 활발했지만, 실제 감축 비용과 설비 전환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산업계의 현장 목소리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다배출 업종의 경쟁력 저하 우려, 막대한 전환 투자 비용, 고용 충격, 수출 규제 대응과 같은 쟁점은 전문가 설명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다뤄졌을 뿐, 이해당사자인 기업·업계 관계자의 직접 발언과 반론은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다. 숙의민주주의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미래세대뿐 아니라, 실제 산업 현장의 입장 역시 보다 대등하게 공론장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결국 ‘시민의 선택’은 기후위기를 둘러싼 사회적 선택이 더 이상 전문가나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자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감축 경로를 둘러싼 합의가 진정으로 힘을 가지려면 시민의 절박함과 미래세대의 권리, 과학적 경고뿐 아니라 산업 현장의 현실과 전환 비용의 문제까지 함께 다뤄져야 한다는 과제도 남겼다. 이번 공론화가 한국 기후정책을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릴지, 아니면 선언적 숙의에 머물지는 앞으로 남은 입법 논의와 공론장 설계가 가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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