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년 한국인 12,026호에 급수율 27%
6만4천여명 급수량 1만톤, 12톤에 2원
1917년, 인천 內里 수도꼭지서 맑은물 ‘펑펑’
서울 종로보다 인천 언덕배기 수돗물 먼저 들어와
1세기 전만 해도 수도와 전기를 통 모르고 있던 우린나라가 현재 용수와 전력에 그다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지내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놀라운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260만의 인구와 많은 공장이 집결하고 있는 인천이 만족할만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고생스럽던 지난 날이 꿈같기만 하다.
나날이 오염이 심해지는 한강 하류 여러 곳에서 기를 쓰고 취수해도 부족하던 인천의 상수도가 이제 정결한 상류 팔당으로부터 여유있게 송수를 받고 있어 질과 양이 모두 충분하다. 전력은 율도(栗島)와 서관(西串)에 대규모 발전소가 건립되어 타지방으로 송전하고도 남아도는 여유만만한 형편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허다한 우여곡절과 눈물겨운 내핍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1917년 6살이 되던 해에 인천 내리(內里)로 내려왔는데 뜰 한구석에 서 있는 수도꼭지를 틀면 맑은물이 쏟아져나와 몹시 신기했던 것이 엊그저께의 일 같기만 하다. 이사오기전 서울 관수동 집에서는 우물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울 종로복판보다 인천 내리 언덕배기에 수돗물이 먼저 들어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전동 대화양조장 앞 웃터골 우물 제일 커
내왕 일본선박 큰 샘 있는 풍도서 급수해
제물포가 개항이 되자 사람이 살 수 있는 아무 채비도 없는 해변가에 갑자기 대·소선박과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과 각지의 한국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해변가에는 우물이 없었고 내륙의 저지대인 전동(錢洞), 용동(龍洞), 화수동(花水洞), 송림동(松林洞)에 몇 군데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현재 전동 대화양조장 앞에 있는 웃터골 우물이 제일 컸다.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일본지계와 청국지계의 주민은 식수를 간신히 웃터골 우물에서 충당하고 있었으니 선박급수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인천을 내왕하는 일본선박은 해변가에 큰 샘이 있는 풍도(豊島)에서 급수를 했었고, 1884년부터 식료잡화를 수입판매하던 청상이 늘면서 1887년에 일인이 웃터골 우물물을 북성동 해변가로 끌어다 소형선박으로 나르는 급수사업을 시작했다.
1889년에는 지금도 북성동파출소 앞에 남아 있는 큰 우물 3개를 굴착하는데 성공하여 일당 500톤을 선박에 공급하고도 여분을 일반시민에게 판매할 수 있어 일인의 용수사정은 비로소 완화되었다. 1895년에 청일전쟁이 끝난 후 재력과 권세가 생긴 일인은 여러 곳에 큰 우물을 파서 다량의 용수를 얻게 되어 일본주 양조장, 간장공장, 대중목욕탕 등이 속속 생겨났다.
전쟁경기 상수도건설 긴급과제로 등장시켜
’06년 도지부수도국 주관 상수도공사 착수
그러나 한국인 거주지역에서는 구태의연하게 이전부터 있던 큰 우물 몇 개와 필요에 따라 이곳 저곳에 판 간이 우물이 늘어나는 인구의 식수를 간신히 공급하는 형편이었다. 20세기를 맞게 된 인천의 인구는 한국인 9,900명, 일인 4,200명, 청인 2,300명, 양인 63명이었는데 로일전쟁을 치루고 난 1905년에는 한국인과 청인의 수효는 별로 늘지 않았으나 일인은 3배인 12,700명으로 급증했다. 전쟁경기가 인구증가와 용수소비를 촉진하여 상수도 건설이 긴급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곧 일인들은 인천과 서울 일대에 상수도를 부설할 계획을 세우고, 1906년에 한국 정부 도지부수도국이 명목상 주관이 되어 일본의 차관과 기술로 공사를 착수했다. 노량진에 취수장과 정수지를 구축하여 인천과 용산방면에 통수하기로 했는데 인천지구가 공사가 빨리 진척되어 급수가 서울보다 앞서 개시되었다.
급수통계를 보면 초기에는 전적으로 일인 위주였고 한국인 거주지역은 안중에 없었던 것 같다. 설사 그렇지 않았다해도 거리와 부설비로 보아 한국인 가정에 보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1931년, 확장계획 불구 실행 못한 채 해방
요금 월최저 12톤에 2원 굉장히 비싼 물값
1915년 이후에야 일인촌에 인접해 있는 내리(內里) 답동(畓洞)으로부터 시작해서 외리(外里), 용리(龍里), 율목리(栗木里) 등으로 퍼져 나갔다. 1931년에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확장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1931년의 급수율은 일인 2,655호에 2,423전(90%), 한국인 12,026호에 3,111전(27%)으로 되어 있다. 총인구 63,800명에 급수량은 1만톤 전후였고, 요금은 월최저 12톤에 2원이었다. 쌀 1승(升)에 20전 미만이던 때라 굉장히 비싼 물값이었다.
해방 후 노후된 소규모 시설을 가지고 급증하는 인구를 격일 시간제 급수로 간신히 충당하다가 50년대 말부터 시설확장에 착수하여 70년대에는 급수량이 25만톤, 80년대들어 40만톤에 달했다. ’83년도에 확장공사가 완성되면 급수율이 94%가 될 것이라고 한다.
수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해방전부터 근 40년간을 인천광역시 수도사업 한 길에만 헌신한 李鶴鎭 전 수도국장의 공적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으로서 섣달 그믐날 밤에는 방마다 환하게 등불을 밝히고 밤을 세우는 행사가 있었다. 필자가 9살 때부터 밝은 전등불에 밀려 이 행사가 사라진 기억이 있으니 내리(內里)집에 전기가 가설된 것은 1920년이었다고 생각된다. 수도보다는 늦었으나 다른 동네보다 전기가 빠리 들어온 것은 역시 내리(內里)가 日人촌과 인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좌우간 필자는 집안 덕으로 어려서부터 수돗물이 나오고 전깃불이 환한 집에서 자라난 행운아였다.
신태범-1912년 서울생, 경성제국대학의학부 졸업, 의학박사, 외과의원, 인천의사회장, 중앙교육위원, 인천시행정자문위원장, 국제로타리 365지구총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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