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상수도 올해로 95년

취재부 | eco@ecomedia.co.kr | 입력 2005-05-18 18:01:03
  • 글자크기
  • -
  • +
  • 인쇄
인천의 상수도 역사는 18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4년부터 인천에는 식료잡화를 수입 판매하던 청상이 늘어나면서 1887년 일본인이 웃터골 우물물을 북성동 해변으로 끌어다 소형선박으로 나르는 급수사업을 시작한 바 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는 일인에 의해 큰 우물의 다량 용수공급이 가능해지면서 일본주 양조장, 간장공장, 대중목욕탕 등이 속속 생겨났다. 1905년 전쟁경기가 인구증가와 용수소비를 촉진하여 상수도건설이 긴급과제로 등장하면서 1906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 1910년에 인천상수도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송현배수지가 준공되어 급수량 15,570톤의 인구 7만 명의 급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상수도건설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인천시는 송현배수지의 준공을 기점으로 올해 95년의 상수도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편집자주-


A·I·D차관사업 통해 시민급수 원활해지면서 상수도서비스 확대
큰 강 없어 담수 확보 결점, 경인수도 설계완성이 인천상수도 시초



광복이전의 상수도사업

1910년 인천상수도 효시 송현배수지 준공
1993년 풍납취수장 착공 원수부족 해결


인천에 상수도 시설을 시작한 것은 1905년 2월이었다. 당시 유력인사 40여명으로 임시 급수위원회를 설치하고, 문학산 계곡에 1일 1인당 사용량이 10gallon(약 38ℓ)으로, 약 14,000여명의 급수능력을 가진 수원지를 설치토록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실현되지 못하고, 동년 8월에 한강연안에 노량진 수원지를 건설하고 인천에 급수하도록 계획하였고, 경인수도의 설계가 완성되었던 바, 이것이 인천상수도의 시초이다.
1906년 6월 舊 한국정부 경기도지부에 수도국을 신설하여 수도부설 계획을 추진토록 하여 동년 11월에 공사를 착수, 4년 후인 1910년에 인천상수도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송현배수지가 준공되어 급수량 15,570톤의 인구 7만 명의 급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이후 1914년 9월 영등포 분기 공사를 착수하여 1922년 인천에서 운영하는 수원지 전 생산량의 1/2을 서울에 용수키로 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수도 공급노력은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25동란 피해가 막심하여 인천의 상수도 시설은 사용불능 상태가 되었다.
1951년 수복이후 인천이 중요한 전략기지가 되므로써 작전수행상 수도복구공사가 초긴급상황이 되어 당시 군 당국과 각 원조기관에서의 적극적인 원조로 송수를 복구하는 등 상수도사업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65년부터 시작된 A·I·D차관 사업을 통하여 가양취수장, 수봉산배수지, 시내배수관 확장사업과 김포정수장 확장사업을 통하여 시민급수가 원활해지면서 상수도서비스의 확대를 가져왔다. 또한, 그동안 가양취수장에서 송수되는 원수의 수질이 악화되므로써 수도권 1·2단계 광역상수도사업의 시작으로 383,000㎥/일의 원수를 팔당으로부터 공급받게 되자 만성적인 용수부족 현상을 보인 인천은 1993년 가양취수장을 폐쇄하고 현 인천소유의 풍납취수장을 착공하므로써 원수부족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수도권 4·5·6단계를 거쳐 공급되는 원수를 인천 국제공항, 송도신도시, 경인운하 등에 공급하기 위해 정수장을 건설하는 등 인천시민을 위한 안정적이고 풍부한 수돗물의 공급에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담수·급수 필요성 ’05년부터 상수도시설
국고결핍 日흥업은행서 1천만 원 차입


인천의 경우 입지조건이 수도 서울의 관문이 되는 국제 항구도시로서 서쪽, 남쪽일부, 북쪽일부 등 삼면이 해면으로 돌출한 반도형 도시형태이며, 큰 강이 없어 담수를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최대 결점이며, 인천이 개항되어 담수와 급수의 필요성을 느끼고 상수도의 시설을 시작한 것은 1905년 2월 이었다.
당시 民團長(민단장) 부전정사의 정의 제창에 따라 수도부설에 관한 좌담회가 열려서, 山根小將, 加藤영사, 石橋박사 및 기타 유력인사 40여명을 민단 役所(역소)에 초대하여, 임시급수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협의하여 加來榮太郞 등으로 하여금 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사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石橋박사의 지도아래 다음과 같은 수도부설의 설계가 완성되어 당시 인천에서 1.5里정도 떨어진 문학산 계곡에 1인 1인당 사용수량이 10gallon(dir 38ℓ)으로, 약 14,000여명의 급수능력을 가진 수원지를 설치토록 진행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이후 동년 8월 내무성 기사 中島박사의 지도아래 경인수도 실지 답사 후 한강연안 노량진에 수원지를 설치하여 경성, 용산, 인천에 급수하도록 계획하였고, 경인수도의 설계가 완성되었던 바, 이것이 인천상수도의 시초이다.
1906년 6월, 정부에서는 수도를 부설하도록 결정하였지만, 국고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자금의 어려움을 겪자, 伊藤博文이 한국정부에 권고하여 관세수입을 담보로 하여 일천만원을 일본 흥업은행으로부터 차입하여 경기조지부에 수도국을 신설하여 中島, 川上兩박사에 공사감독을 위촉하여 주임기사 在野박사의 지도아래 동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였다.

송현배수지 ’08년 준공, 무근아치 콘크리트구조
인천 운영 수원지 전생산량 1/2 서울에 송수해


본 공사를 준공한 것은 1910년 9월이지만, 수원지는 기관실, 침전지, 여과지 등의 제설비를 가지고 있고, 여과시켜야 하는 정수는 송수펌프에 의하여, 같은 장소의 산꼭대기에 있는 정수지로 퍼 올린다. 정수시킨 물은 또한 자연유하에 의해 구경 20inch(∮500m/m)의 주철관으로 30.8km의 구간을 통하여 인천송현동 배수지로 송수되어 인천시가에 보급되어진다.
송현배수지는 1906년 11월에 기공하여 1908년에 준공되었으며, 구조는 무근아치 콘크리트조로 되어있고, 보유수량은 15,570㎥을 저수하는 동시에 각종 중요공장을 위시하여 선박급수 및 일반가정용으로 급수를 하였다.
이후 1914년 9월에 영등포 분기급수 공사를 착수하여 동년 12월에 공사가 완료되어 급수를 시작하였고, 서울지구의 시가발전을 수반하여 서울 급수를 목적으로 1919년 노량진수원지 확장공사에 착수하여 기존능력의 2배, 다시 말하면 생산량 1일 12,000㎥에서 24,000㎥으로 확장케 되었고, 한강 인도교에 ∮400mm 철관 가설공사를 1922년 3월에 준공한 후 인천에서 운영하는 수원지 전생산량의 1/2을 최소한도로 서울에 송수키로 하였다.
그 후 경인간의 도시는 급격하게 발전되어 영등포는 공업도시가 되었으며, 김포에 비행장이 건설되므로써 광활한 부평평야가 공업용지로 조성되는 동시에 일제의 조병창이 건설되면서 불가피하게 이들 장소까지 인천송수관이 중도에서 분기급수하게 되었다.

혼란기의 상수도사업

1945년 급수수요량 증가로 격일 제한급수
기초공사 없이 관 포설 접합구 파열 계속


1945년 역사적인 8.15 광복을 맞게 되었고, 광복과 더불어 김포비행장은 일약국제공항으로 비약 발전하였으며, 부평-조병창지구와 부근지역은 연합군이 집단주둔하게 되어 두 지역의 수요급수량만 ∮500mm 송수관 단선으로는 급수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또한 인천항이 국제항구로 발전함에 따라 대형 선박의 입·출항이 빈번해지고 인천시내에 소재한 각 군사기지에서도 급수수요량이 증가함에 따라 부득이 일반시민에게는 격일 제한급수를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평~인천구간의 ∮500mm 송수관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계획 하에 부평펌프장 가압능력을 1일 16,000㎥에서 24,000㎥(부평지구 급수량포함)으로 증가시키기 위하여 170마력 펌프 3대를 증설하고 노량진에서 부평까지는 ∮900mm 기존 송수관을 활용하고자 미비한 부분에 대한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통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장거리 대형 흄관에 통수한 결과, 노량진에서 영등포까지의 국도를 통한 송수관에서는 대형차의 왕래에 따르는 진동으로 관 접합구의 파열이 속출하고 영등포에서 부평까지의 송수관은 대부분이 지반이 연약한 논과 밭을 통과함으로써 기초공사 없이 관을 포설하여 관의 자체중량에 수압이 가중될 때마다 침하동요로 접합구 파열이 계속된다. 송수하기 위한 송수관이라기보다 수리하기 위한 송수관이 된 것을 필사적인 노력과 유지관리를 통해 인천시내에 갈증을 면할 정도의 급수공급을 하였다.

60만 수원지 부평서 김포로 신설 계획 변경
송수관 보강공사 및 증설공사 식수난해결 한몫


6·25전란 이후 종래의 한정된 시설 안에서 보강수리만으로 유지, 운영하려는 고식적인 방법은 지양되고 근본적으로 현재의 식수난을 타개하여 앞으로의 백년대계를 위한 인천지구 전용수원지 신설공사와 송·배수관 시설확장공사가 필연적으로 요청됐다.
중앙에서도 이 사태를 직시하고 국고보조로서 인천시 수도확장공사를 추진하기로 계획이 수립되어 부평, 인천지구에만 급수할 목적으로 부평에 수원지를 신설하고 부평까지는 한강원수를 송수하기로 실시계획을 완성하였다.
1953년 9월에 부평 갈산동 현 부평배수지 구내에 인천의 최대인구 60만까지는 급수할 수 있는 수원지 신설공사를 착수 추진도중 협조기관인 OEC에서 김포비행장 급수불능을 이유로 반대하게 되어 김포, 부평, 인천전역에 급수할 수 있는 지점인 김포군 양동면 신당리에 수원지를 신설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여 1956년 4월에 김포수원지 신설공사를 착수하게 되었다.
김포수원지 신설공사 착공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인천시 상수도 확장공사의 제1차적인 공사개요는 먼저 김포수원지까지 한강원수를 송수하여 정수를 생산하도록 되어있어 원수의 송수경로는 한강인도교 상류 쪽에 취수펌프장을 신설했다.
송수관은 기 설치되어 있는 ∮900mm 흄관을 이용하기로 하되 노량진~영등포 구간의 국도에 매설된 부분은 진동으로 인한 파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선로를 한강부근으로 변경·포설하였다. 영등포 구청앞 도로 횡단하는 부분은 ∮800mm 강관으로 교체·포설하는 등 전선로에 걸친 보강공사를 실시하여 김포수원지까지 1일 50,000㎥의 원수를 송수할 수 있도록 하는 수원지공사와 병행하여 착수한지 3년 6개월만인 1959년에 1일 32,000㎥의 정수를 생산할 수 있는 김포수원지를 완공한 것이다.
김포수원지 준공으로 흡족한 정수량은 확보되었으나 수원지에서 생산된 정수전량을 인천까지 송수시킬 수 있는 거대한 증설공사가 남아있었다. 또한, 통수중인 수원지에서 부평구간의 ∮900mm 송수관 보강공사와 부평펌프장 증설공사도 함께 실시하여 1960년 부평~인천구간과 노량진~김포수원지구간 ∮500mm 주철관의 이설 계획으로 당시 인천의 식수난 해결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극복기의 상수도 사업

1966년 2실 5국, 14과 50계로 확대 개편
구제실시 당시부터 수도국은 2실 5국 포함


1966년 12월 3일 인천시 규제 제204호로 제정한 인천시 직제에 의하면, 인천시 기구는 종래의 2실 10과에서 2실 5국, 14과 50계로 확대 개편되었다.
2실 5국은 공보실·기획실·총무국·보건사회국·산업국·건설국·수도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획실은 이미 1966년 6월 27일에 신설된 기구이다.
광복이후 꾸준히 발전하여 온 인천시는 1968년 인구 55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서울·부산·대구에 이어 전국 4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어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市勢가 확장됨에 따라 시 본청의 업무도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인천시는 행정수요의 증가현상을 해소하고, 시 행정을 효율화하기 위해 일반 행정업무를 區와 洞에 이양하였다.
구제실시 당시 市본청의 기구는 시장 아래에 부시장과 문화공보실·기획감사실·총무국·보건사회국·산업국·건설국·수도국 등 2실 5국을 두었다.

’67년 A.I.D와 성공적 협의, 순조로운 확장사업
’71년 4월 26일부터 부평정수장 물로 급수시작


인천은 수도서울의 관문이며, 임해공업도시로서 급격히 발전하는 시세확장과 시민생활 향상에 따르는 상수도 수요량 급증으로 1970년대 후반에 인구 1백만이 예상되며 따라서 김포정수장 시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또한 김포정수장을 확장한다 하더라도 부지여건상 2~3만㎥ 정도 확장에 불과하게 되므로 인천시 행정구역내에 새로이 건설할 정수장 부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 당시 유도지였던 현 부평정수장 위치에다가 1일 12만㎥ 규모의 정수장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상수도 확장사업의 시기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하여 차관 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내자 2억4천1백만 원(재정융자 1억7천6백만 원과 시비 6천5백만 원)을 확보하여 1차로 현 부평정수장 부지에다 침전지 3지와 수봉산에다 1만㎥ 규모의 배수지 축조공사를 1967년 4월 23일 착수하였다. 그 후 다행히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한 국제개발처)와 성공적인 협의로 1967년 6월 30일 차관협정을 체결하므로써 확장사업은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1971년 4월 14일 기본공사가 완료되므로써 4월 16일 오전 8시부터 가양취수장 펌프시운전을 개시하여 12시간만인 오후 8시에 부평정수장에 물이 도착함으로써 1단계 시험통수작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부평정수장내의 제반기계장치의 시운전을 거쳐 1971년 4월 22일 오전 11시부터 송수펌프운전을 개시하여 수봉산배수지까지의 관로청소를 4일 동안에 완료하였고, 1971년 4월 26일 오후 1시 40분부터 부평정수장에서 생산된 물로 급수를 시작하였다.

성장기의 상수도사업

’72년 12월 A.D.B 차관협정 체결 ’73년도 착공준비 완료
’79년 5월 30일 통수시험 부평정수장에 팔당수 도착 성공


한강상류의 기존상수도 취수원들은 서울, 인천 및 성남의 기존 정수장에 수질이 양호한 팔당댐의 원수를 공급하여 수원, 안양 및 반월 新공업도시 등 수도권전역의 급수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1971년 초부터 정부 관계기관에 협의가 이루어져 1차 시안이 입안되었으며, 지속적인 연구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본 계획의 필요성과 시기적 긴급성을 느낀 정부는 1972년 5월 12일부터 기본계획조사를 착수하였다.
5월 27일 계획 내용을 정식으로 발표함과 동시에 건설부는 국내용역회사와 본 계획의 기술조사와 타당성 연구 분석 등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위한 용역계약을 하였으며, 1972년 12월 28일에는 A.D.B차관협정을 체결하므로써 1973년도 착공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다.
특히, 취수시설의 취수관 일부분이 팔당댐 공사시 매설되어야 하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한국전력주식회사의 협의결과 한전과 동시 공시토록 합의되어 1973년 5월 15일 팔당댐 저수지내의 취수탑공사를 착수하였다.
1973년 12월 5일 외국인기술용역계약을 체결하여 실시설계를 하였고, 1974년 7월 22일 취수장과 관로공사를 착수한 이래 14차에 걸친 부분 준공 끝에 1979년 5월 31일 완전 준공되었다. 통수시험은 1979년 5월 16일 팔당취수장의 펌프운전을 개시하여 15일 만인 5월 30일 최종관말인 부평정수장에 팔당수가 도착되므로써 통수시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수도권 광역상수도 시설에서 공급될 총량은 260만㎥/일으로써 1단계 사업으로 120만㎥/일, 2단계 사업으로 140만㎥/일을 공급하게 되었다.
도시별 공급계획량은 1단계사업 120만㎥/일중에서 서울에서 66만7천㎥/일, 인천시에 48만3천㎥/일, 성남시에 5만㎥/일미며, 2단계 사업 140만㎥/일중에서 서울시에 100만㎥/일, 성남시에 5만㎥/일, 수원시에 10만㎥/일, 안양시에 10만㎥/일, 반월단지에 15만㎥/일을 공급하도록 계획되었다. 따라서 인천시는 1단계 사업에서만 48만 3천㎥/일을 공급받게 되었는데, 본 계획량 중에는 김포정수장에 공급될 11만㎥/일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김포정수장을 서울시에 이관한 당시에서는 부평정수장에서 받게 될 37만3천㎥/일이 총 계획량이다.

’80년대 부평정수장 용수수요 부족 정수장 신규건설 추진
노온정수장, 급수 지장 시에는 수시로 담당 공무원 파견


198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기존 부평정수장의 급증하는 용수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어 정수장의 신규건설이 추진되었다.
이때 정부가 수도권일원의 만성적인 급수난 해소, 인구증가 및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수도권 광역상수도 3단계사업(1984~1988)을 시행함에 따라 인천시는 이의 일환으로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25번지에 정수능력 560,000㎥/일의 정수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노온정수장의 운영은 2차에 걸쳐 인천직할시와 경기도(부천, 광명, 시흥) 간에 운영협약을 맺어 실제운영은 인천직할시에서 전담하고, 부천시 외 2개시에는 분기 이후의 밸브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때 부천시장, 광명시장, 시흥시장은 급수량의 변동으로 급수에 지장이 있을 시에는 수시로 담당 공무원을 파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정수장 사업계획에 따른 사업비, 유지비 및 기타 제경비의 부담은 각 시의 정수공급량에 따라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도약기의 상수도사업

특수정수처리방법 도입해 처리할 정도로 원수수질 악화
수도권 광역상수도 4단계사업 따라 남동정수장 건설시행

인천시의 유일한 자체취수장인 25만㎥/일의 가양취수장은 한강상류에 위치하여 안양시의 직하류에 의한 오염의 증가 및 조수에 의한 역류현상의 영향 등으로 인해 상수원으로서의 원수수질이 한계에 도달하여 특수정수처리방법인 분말활성탄투입, 산소주입, 입상활성탄 여과방법 등 특수정수처리방법을 도입하여 처리할 정도로 원수수질이 악화되고 있었다.
또한 수도권 광역상수도 4단계사업의 계획변경으로 당초 50만㎥/일 공급계획 이었으나 35만㎥/일만 공급되므로써 15만㎥/일이 감소하는 등 중장기 생산계획에 따른 계산정수장(계획시설용량 45만㎥/일)의 신설 필요성 등이 가중되어 70만㎥/일의 취수원 확보가 시급하게 되었다. 인천직할시는 1988년 12월 수도권 광역상수도 3단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완공된 노온정수장으로부터 300천㎥/일의 수돗물을 공급받게 되므로써 전체 상수도시설용량이 800천㎥/일로 증가되어 과거의 심각한 급수난은 다소 해소되었다. 그러나 인천직할시의 급격한 도시발전 및 인구증가를 감안할 때 1990년 이후부터 용수부족 현상이 예상되므로써 지속적인 상수도시설의 확충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인천직할시는 예상되는 급수부족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건설부에서 추진 중에 있는 수도권 광역상수도 4단계사업의 계획 배분용량 및 공급방안에 따라 남동정수장 건설사업을 시행케 되었다. 남동정수장은 팔당댐에서 취수하여 수도권 4단계를 통하여 원수를 공급받게 되어 있으며, 사업을 위한 계획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92년 시설용량 542,000㎥/일 남동정수장 완공
’95년 시설용량 250,000㎥/일 공촌정수장 건설


인천의 인구는 ’93년 1월 1일 현재 2,071 천명에 달하고, 천연적으로 해안의 굴곡이 많아 외항과 내항이 구비된 해안도시이며, 한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수도권지역의 중추도시이다.
이러한 지형 및 사회적인 여건으로 급속한 도시발전에 따라 인가증가율이 연평균 5%를 상회하고 있으며, 공업단지 조성이 지속적으로 증가되고 있었다.
또한, 인천은 영종도에 인천국제공항(당시는 신국제공항) 건설에 따른 영종권 계발계획의 추진으로 도시의 확장이 예상되어 생활·공업용수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였으나, 1992년 10월 남동정수장(시설용량 542,000㎥/일, 인천분 350,000㎥/일)이 완공되어 용수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1995년부터는 또다시 용수부족이 예상되어 서울시와 공동 건설한 잠실취수장에서 원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정수장을 인천의 서구 공촌동에 시설용량 250,000㎥/일(장래 450,000㎥/일) 규모의 공촌정수장 건설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
정수장의 위치는 인천 서구 공촌동 산100번지 일원이며, 급수대상지역은 인천 서구 일원과 향후 영종도 新국제공항지역을 주 대상지역으로 하였다.
본 사업은 1, 2단계로 구분되어 실시되는데 계획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저작권자ⓒ 이미디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뉴스댓글 >

헤드라인

섹션별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

오늘의 핫 이슈

ECO 뉴스

more

환경신문고

more

HOT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