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된 ‘고물’ EPR제도 이젠 좀 바뀔 때도…

기초연구조차 시행된 적 없어 무관심 속에 죽는 것은 약자뿐
편집국 | eco@ecomedia.co.kr | 입력 2012-09-06 09: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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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R제도의 재활용의무대상 품목으로는 4개 포장재(종이팩, 금속캔, 유리병, 합성수지재질 포장재)와 자동차, 전기·전자제품 외 6개 품목이 있다.

이처럼 많은 품목들이 하나의 제도권 내에서 운영되는 데다 한 품목 내에서도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얽혀 있어 크고 작은 마찰을 빚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10년째 시행되고 있는 EPR제도의 현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지난달에 이어 두 번째로 게재되는 이번 기사에서는 물량 확보를 위한 이해관계자들의 경쟁과 정부의 무관심 사이에서 외면 받는 중소업체의 상황을 집중 조명해본다.

재활용 물량은 부족한데 RC센터는 추가증설

과거에는 처리하기 급급했던 폐기물이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면서 수익으로 연결됐고, 이는 곧 누가 물량을 더 많이 처리하느냐에 대한 경쟁으로 번지게 됐다. 결국 물량확보가 EPR제도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제품군에 속하는 전기전자제품, 즉 폐가전은 다른 제품군과 비교했을 때 조금 특수한 상황이다. 폐가전의 경우 EPR 제도가 도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전자 3사가 문전수거를 통해 폐가전을 회수했으며, 전자제품 재활용을 담당하는 한국전자산업환경협회 역시 EPR제도가 도입되기 전 삼성, LG, 대우 등 대기업의 제조사들이 출자해 만들었다.

이 협회는 주로 대기업 가전 제조사가 자체 대리점 등에서 판매 후 회수한 폐가전제품을 지역별로 설치한 7개의 리사이클링센터(RC)에서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 협회에서 설치한 7개의 RC센터는 수도권, 경기북부권, 충청권, 영남권, 경북권, 호남권, 제주권으로 각 권역별로 위치하고 있다.

이때 경북권(YRC), 경기북부권(KRC) 센터가 작년에 추가 건립되면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국내 폐가전제품의 물량은 2010년만 해도 증가추세였다. 이에 협회는 회수 물량이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작년 5~6월 두 달 동안에만 두 센터를 추가 준공했는데, 협회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경기둔화로 인해 처리물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경기침체로 물량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처리센터 증설까지 더해져 회수 처리물량은 줄고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자 급기야 협회 회원사끼리의 물량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됐고, 기존 중소협력업체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됐다.

중소업체 왕따 시키는 정부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환경부는 작년 4월 ‘전기전자제품의 자원순환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올해 1월부로 시행령을 공고했다. 이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판매업자의 회수의무 및 인계의무에 관한 법률 개정안’으로 기존법령을 개정함에 따라 관련 중소업체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전의 폐가전은 생산자의 제품, 판매자의 제품을 각자가 지정한 협력업체에서 회수 및 처리해왔다. 그러나 폐가전 물량이 줄어들면서 생산자, 즉 협회에서 판매자의 물량까지 처리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 것이다.

중소업체들은 이 법령에 기록된 공제조합이 ‘설치한’ 수집소를 지정한다는 문구는 결국 공제조합만이 회수 물량을 처리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이는 기존의 재활용 중소업체가 배제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EPR제도가 생기기도 전부터 국내 폐전자제품을 수거해 처리해오던 중소업체들은 EPR제도가 생긴 후 대기업이 폐가전을 거의 독점회수하다시피 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됐다. 이에 중소업체가 찾은 생존방법은 생산자의 물량 대신 판매자의 물량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작년 판매업자의 폐가전제품에 관한 회수의무가 법제화되면서 판매자의 폐가전제품 물량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중소업체들은 판매업자의 증가하는 물동량에 대비해 공장을 확충시키고 신규 설비를 투자해 판매자의 제품을 회수 및 처리했다.

그런데 돌연 개정된 법률안의 내용에 이를 대처할 여유조차 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이 정부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인지 궁금하다. 법으로까지 대기업의 편의를 봐 주는 정부가 세상에 또 있을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한편 이렇게 고래들 사이에서 새우 등 터지는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전기·전자제품뿐만이 아니다. 재활용시장이 상당히 큰 포장재품목에서 겪는 어려움도 전기·전자제품 못지않았다. 최근 포장재 폐기물이 유통센터를 통해서만 유통되도록 하는 법률이 제안되면서 EPR제도가 영세업자와 같은 약자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드는 제도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이들은 공제조합 등에 특혜적 권한을 부여하면서까지 재활용의무 이행률을 높일 것이 아니라 일명 ‘고물상’이라 불리는 영세업자까지도 재활용 사업의 일원으로 인정해 재활용의무 이행률을 제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품목별 ‘인허가 시스템’ 마련이 급선무

여기서 환경부가 우려했던 부분은 판매자 측에서 지정한 업체의 처리과정이 적합한지에 대한 확인이 불투명하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법적 채무가 없는 만큼 무상으로 제공돼야 할 재활용 처리물량에서 부당 이익을 취하는 업체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실제로 환경부에서는 국민이 부담한 처리비용을 부당하게 취하는 등 일부 판매회사의 영업활동으로 얼룩진 거래 행태의 조짐이 보였고, 이를 제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이번 법령을 이행하도록 한 것이라고 전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유가성 재활용품의 물량 배분권을 두고 시장에서 손해를 봤다는 입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 제도가 정착돼가는 상황에 국민이 환경적으로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맡겨놓은 비용을 환경오염과 더불어 부당하게 취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즉 판매자가 회수한 폐가전의 유통경로 체계가 투명하게 이뤄지는 것을 지향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매자와 협력업체 간의 사업을 법으로 차단하는 것보다 정당하게 정부의 인허가를 받은 업체의 권리를 보장하고, 인허가 업체에게 위탁했을 때 의무율을 달성한 것으로 인정해 주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선행됐어야 한다.

지금까지 판매자와 협력업체 간의 거래관행을 떠나서 협력업체의 자격을 정부에서 검증하는 것이 먼저 이뤄졌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에서 인허가조차 받지 않은 업체가 무분별하게 위탁받는 것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충분히 옳다. 그러나인허가를 받았음에도 유통경로에 문제가 있다고 이를 제재한다면 정부는 결국 제도 자체의 결함에 대해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는 비단 폐가전뿐만 아니라 EPR제도 전체를 아우르는 검증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세상은 변하는데 제도는 10년 전 그대로

이 같은 시스템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EPR제도에 대한 연구가 시급히 진행돼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매년 EPR제도에 대한 성과가 조사돼왔지만 이러한 조사결과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EPR제도가 처음 시행됐을 때 대다수의 중소업체들은 생산 활동과 관계없이 재활용의무 대상에서 면제됐었다. 전체 재활용 물량 대비 중소업체의 비율은 약 3%로 처리물량이 1,000톤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무대상자로 지정된 것은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현재에는 시장이 급격하게 변했고, 3%에도 미치지 못했던 중소업체의 물량 역시 대폭 증가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10년 전 법에 근거해 중소업체에서 생산한 제품이라는 이유로 재활용의무 대상에서 면제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정부가 EPR제도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시행되고 있는 조사들이 허수가포함된 잘못된 조사라는 의견이 나오는 것이다. 이에 중소업체들도 재활용의무 대상에 포함을 시키거나 아니면 대기업의 재활용 의무율을 낮추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실제로 과거 우리나라 하수도 보급률에 관한 통계가 전면 조정된 적이 있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하수도 보급률이 매년 증가함에 따라 약 70%에 달하는 등 선진국 수준에 해당됐었다. 그러나 현실은 하수도 보급률이 채 50%도 되지 않았고, 이를 제대로 바로잡기 위해 조사의 기준과 방법을 다시 마련해서 결국 현실적인 통계결과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현실적인 조사가 EPR제도에서도 시행돼야 한다. 뿐만 아니라 EPR제도가 실제 폐기물재활용에 기여하는 정도, 각각 품목에 따른 재활용 성과 등 기초적인 연구가 ‘제대로’ 시행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원순환연대 홍수열 정책팀장은 “이미 10년 동안 구조가 형성된 EPR제도를 단기간에 바꿀 수는 없다”면서 “제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연구들을 통해 장기적인 로드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활용의무율 높으니 외부지원은 의미 없다?

본지는 지난 호에서 제기한 ‘EPR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취재를 계속해서 진행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재활용 의무율이 높기 때문에 외부 지원체계는 의미 없다’라는 논지 자체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물론 일부 품목의 경우 EPR제도권에 속하지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운영관리가 충분히 가능하며, 유가성 역시 100% 확보된 상태였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놓고 봤을 때 사회적 비용이 필요 없을 정도로 회수가 잘되고 자원화 된다면 굳이 정부에서 행정력을 낭비해가며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A 협회 관계자는 “대부분의 국가정책은 장기계획 10년, 중장기계획 5년으로 시행된다. 최근에는 더욱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를 맞아 3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EPR제도만큼은 한 개의 법률로 10년을 끌고 왔다”면서 “우리나라 구조에 맞게 정착됐다는 장점도 있으나 세계에서 유래 없는 정책으로 고착화됐다는 문제도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자생력 있는 품목은 ‘졸업’시키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시대에 맞는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반면, 앞의 의견과 전혀 다른 입장도 있다.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자원 재활용’이란 시장에서 창출되는 가치보다 사회적으로 창출되는 가치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장원리에 의해 한 품목의 재활용 비율이 80%가 된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의미가 더 클 수 있다. 따라서 재활용으로 얻는 수익과는 별개로 사회적 기여도를 인정하고, 제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정부지원, 공평한 ‘배분’ 필요

그렇다면 원론적인 입장 차이를 떠나서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일까.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 지원을 해줘야 한다면, 결국 ‘배분’의 문제가 남게 된다. 재활용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역할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생산-판매-소비-폐기-수집-운반-재활용 등 각 단계에 걸쳐 기여하는 업체와 사람들이 있으며, 각자의 역할을 잘해냈을 때 비로소 사회적 가치가 창출된다. 그러니 이로 인한 혜택도 이들 모두가 정당하게 받아야 하며, 이에 대한 배분의 기준과 방법이 세워져야 한다.

지금 EPR제도의 경우 정부가 재활용사업자를 지원해주면 이로 인해 매입 가격이 높아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수집·운반·선별업자가 이익을 나눠서 갖는 구조이다. 그러나 이제는 재활용사업자에게 계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지원금을 배분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난 7월 11일 최봉홍 의원 외 12인이 발의한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 따르면 위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최 의원 외 12인은 재활용가능자원의 회수·유통체계를 선진화하고 재활용가능자원이 원활히 공급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이 법을 발의했으며, 개정안의 기대효과는표와 같다.



이 개정안 역시 비판의 목소리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재활용 사업이 일부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의 목소리 또한 크다.

정부가 앞장서서 관심 갖고 개선시켜야

어쩌면 EPR제도가 1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여러 문제에 당면하면서도 방치됐던 것은 그만큼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구조차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앞의 내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지금부터라도 법 개정안이 발의되는 등 EPR제도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하나 둘씩 모일 때 우리나라의 재활용 사업을 일으키고, 선순환구조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강한 자는 더욱 더 강해지고 약한 자는 생존할 수 없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이 만연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며 영역을 확대하는 일들은 당연한 이치일 수 있다. 이에 대한 명분 역시 누가 봐도 그럴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모두가 당연한 이치라고 고개를 끄덕일 때 정부만큼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관리하기 편하다고 한 쪽에 모든 권한을 몰아주고, 이를 방관하기만 한다면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정책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남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이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돕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약한 자가 함께 상생할 수 있도록 북돋워주고 지원해주는 역할도 갖고 있다.

최근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민주화란 ‘모두가 잘 살자’라는 공산주의식 이념이 아니다. 적어도 노력한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잘 사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산층 비율이 점점 하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맞물려서 EPR제도 같은 한 부분만이라도 재조명되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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