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뚝섬사람들은 대체로 뚝도 정수장 조금 위쪽에 자리 잡은 한강으로 나가 빨래를 했다. 어찌나 물이 맑은지 빨래터에서 굵은 고기들이 낚였으며, 뚝섬 강가에는 미루나무, 버드나무와 같은 아름드리 활엽수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마시는 수돗물의 역사가 시작된 뚝섬. 산업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 과거의 모습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아름다운 추억이 배어있는 뚝섬의 역사를 알아보는 전시회가 열려 관심을 끌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뚝섬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들으러 ‘뚝섬 기획전’이 열린 수도박물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뚝섬은 섬이다?
뚝섬은 오늘날 서울 성수동과 자양동, 구의동 일대를 말한다. 뚝섬의 이름은 비록 섬이지만 실제로는 섬이 아니다. 장마 때 큰 비가 오면 섬이 됐고 건기에 비가 적으면 육지와 연결되곤 했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뚝섬이라는 지명은 왕을 상징하는 깃발인 ‘둑(纛)’에서 유래됐다. 둑은 긴 창끝에 쇠꼬리 등을 달고 왕이 탄 수레 앞에 세워 지금 이곳에 왕이 있다는 것을 근처의 백성에게 알리던 깃발이다.
왕의 행차 때마다 이 둑을 세웠는데,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섬처럼 보인다 하여 ‘둑을 꽂은 섬’이라는 의미로 뚝섬(둑섬) 또는 한자음으로는 뚝도, 둑도(纛島)라 했다. 현재 이 둑의 모형은 수도박물관 입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의 역사는 강에서부터 비롯되었고 모든 도시와 나라는 강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교류의 매개체였던 한강변의 나루 중 뚝섬나루는 퇴적층포구로 강원도 삼림지대에서 생산된 신탄(땔나무, 숯 등)을 한강으로 운반하여 뚝섬나루에 적재했다가 서울로 공급하는 도선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철도와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한강의 교역로로서의 기능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상류지역만을 오가는 나룻배와 뗏목들을 간혹 볼 수 있었지만, 샛강의 매립과 교량의 건설로 인해 그 많던 나루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긴 시간을 흘러온 한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억을 간직하게 됐다. 그 기억들은 강물을 따라 씻겨가지 않고 고스란히 역사로 남아 전해오고 있다.
1908년 뚝섬, 서울을 풍요롭게 만든 꿈의 시작
뚝섬은 맑은 물을 제공하는 수도국이 자리 잡는 데까지 제 역할을 해냈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상수도 시설이 도입된 것은 조선시대 말 개항을 전후한 시기이다.
개항 이후 부산, 인천, 목포 등 신도시에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집중되면서 물을 우물이나 지하수에 의존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되었고 하천도 점차 오염되어 근대식 상수도 시설 도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서울 시내에 전기, 기차 등을 도입한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는 1903년 고종 황제로부터 상수도의 시설, 경영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이들은 1905년 영국인이 설립한 조선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Co.)에 이 특허권을 양도하지만, 다시 그 공사 시행에 도급을 많아 1906년 공사에 착공, 약 2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1908년 지금의 수도박물관 부지에 ‘뚝도 정수장’을 준공했다.
1908년 9월 1일부터 하루 1만 2,500톤의 물을 서울 사대문 안과 용산일대 주민 12만 5,000명에게 공급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상수도 역사의 첫 출발이었다. 이후 서울 광진교에서 난지도에 이르는 한강 본류를 따라 많은 정수장이 설치되었다.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수돗물을 생산하여 공급하기 시작했던 곳으로 근대식 상수도 보급의 효시다.
이 정수장의 ‘완속여과지’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써 1908년부터 1990년까지 사용됐으며,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수돗물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었다.
공동수도의 추억… 줄 서있던 양동이의 행렬
수돗물이 귀했던 시절, 마을의 수도시설 도입은 주민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1960년~1970년대에는 동네에서 수돗물을 팔아 생활하는 집이 각 동네마다 한두 집 있었다.
당시 수도요금은 버스요금과 같은 5원이었는데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공동수도에서 물을 사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양동이의 행렬이 동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한편 1960~1970년대 서울은 급수전쟁의 시기라 할 만큼 식수 부족으로 인해 시민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던 시기다. 상수도 생산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었고, 급격한 인구 증가는 급수난을 가중시켰다.
특히 변두리 고지대 지역의 주민들은 식수를 구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동우물이나 급수차 앞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자신의 순서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시간은 이제 과거가 됐다.
뚝섬은 생성과 변천을 거듭해 오면서 왕의 사냥터, 군대의 검열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수원지, 골프장, 경마장 등으로 변화했다.
최근에 뚝섬은 대규모 서울숲이 조성돼 환경 친화적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어찌 보면 뚝섬은 예전에도 서울시에 속했지만, 서울 변방의 풍부한 생태적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앞으로도 뚝섬은 물 맑고 모래가 유난히도 고왔던 유원지에서 근대 상수도 역사의 출발지로 기억될 것이며, 그 고유의 역사를 품은 환경 친화적 생태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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