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전기요금을 오랜 기간 체납한 경우 전기를 단전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최소한의 전기를 공급해 요금을 체납하더라도 단전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물’ 역시 최소한의 기본권을 인정해주자는 취지에서 ‘물인권(the Right to water and sanitation)’이라는 용어가 대두되고 있다.
“물 6t까지는 인간이 생활하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양이라고 생각하고 무상으로 공급하되, 6t을 초과하면 그때부터는 원가를 포함한 높은 비용을 받는 것.” 물인권과 요금제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한국수도경영연구소(KWI)의 김길복 소장이 ‘물인권’에 대해 예시를 든 내용이다. ※ 본 기사는 김 소장이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됐음.
물 민영화 반대운동이 ‘물인권’으로
영국의 물 전문 리서치 기관인 GWI(Global Water Intelligence)에서 작년 세계 상하수도 요금시장을 조사한 결과 지난 1년 동안 세계 상하수도 요금은 평균 6.8% 상승했으며, 국내 수도 요금은 북유럽의 8분의 1,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하수도 요금이 가장 비싼 덴마크는 m³당 1만 1,412원을 부과하고 있으며 독일, 영국의 경우 7,000원대를 웃도는 수도요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와 비교했을 때 톤당 약 610원을 부과하는 우리나라의 요금체계는 굉장히 저렴하다 못해 불안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적용하고 있는 요금제는 누진요금제로 수돗물 소비량이 증대할수록 단위당 수도요금이 상승하는 구조다. 그러나 국내 수도요금은 실제 평균 사용량을 고려하여 단계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단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목표로 하는 절수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수도사용의 낭비와 비효율을 발생시키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수에즈의 개도국 사업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물인권 어젠다’ 논의를 주도했으며, 2006년에는 자국 수법(Water Law)을 개정해 제1조에 ‘모든 국민의 물인권’을 규정했다.
한편 볼리비아에서 진행됐던 코차밤바 양여계약(1999년 40년간 수도 사업 양여권을 단독 응찰한 벡텔 컨소시엄인 Aquas del Tunari에 주는 계약 체결 내용)은 무리한 프로젝트와 수탁기업의 전문성 부족으로 세계은행은 물론 베올리아, 수에즈 모두 참여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발생한 물 민영화 반대시위가 NGO를 형성하면서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국가적 시위로까지 확산하기에 이르렀다.
볼리비아의 물 민영화 반대운동은 국제 공공노련, 일부 시민단체와 연계해 세계적으로 확산됐고, 볼리비아가 주도하여 유엔에 ‘물인권’ 의결안을 제출했다.
이에 전 세계 33개 개발도상국이 의결안 Draft 제출에 참여했으며, 이후 2010년 7월 28일 유엔 총회에서 표결을 거쳐 물인권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때부터 물인권이 인간다운 삶의 향유와 모든 인권들에 필수적인 인권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유럽 외 국가들, 이미 물인권 정책 시행
김 소장은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보편적인 서비스에 ‘물’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싸고 좋은 물은 없다. 이제 좋은 물을 먹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유럽은 이와 같은 요금제를 도입해 수도 요금을 책정하고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물인권 개념을 정립하고 각국 정부에 법제화 및 정책 실시를 촉구 중이다. 남아공은 국민의 물인권 실현으로 인해 2001년 6월부터 가구당 월 6m³를 무상 공급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다만 수돗물 공급주체인 각 지자체에서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줬다. 프랑스 정부는 현재 100% 요금 현실화를 유지하면서 저소득층 물인권 보장정책 도입을 추진 중이다.
이미 지역 간 요금격차는 국가 및 유역차원의 교차보조시스템을 구축해 상당부분 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는 올해부터 국민의 물인권 보장을 위해 민영 상하수도 사업 재정지원에 착수했고, 요금이 크게 높은 지역과 주요 시설 사업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 제도를 신규 도입할 예정이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물인권 보장을 위한 정책을 도입하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우 OECD 평균 이상의 양극화가 확인되고 있음에도 저소득층 물인권 보장대책은커녕 논의조차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저소득층 또는 전 국민의 필수 수돗물 사용에 대해 기본권 차원에서 최대한 보장하는 물인권 정책을 논의할 때가 됐다. 그러나 그 전에 단계적 요금현실화, 요금제도 개편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국내 수도요금 원가 재구축돼야
국내 수도 사업은 162개 지자체가 개별적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요금은 각 지자체별로 수도조례와 하수도조례를 제정해서 시행하고 있다. 현재 국내 수도요금의 원가는 777원으로 책정돼 있으며, 요금현실화율은 78.5%에 불과하다.
그러나 김 소장에 따르면 국내 상하수도요금의 실제 원가는 1,200~1,500원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상수도요금 610원, 하수도요금 291원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가격인 셈이다.
원래 수도요금의 총괄원가는 공급비용과 경제비용뿐만 아니라 환경비용까지 포함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국내 수도요금 원가산정에 환경비용은 당연히 포함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지나치게 원가보상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수도요금을 지나치게 총괄원가라는 ‘원가’의 개념으로 보고 있어 수도 사업이 갖는 기후변화 등에 대비한 미래투자재원 확보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수도 사업은 현 상태를 운영하는 데만 급급하게 되는 재정수준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수도요금은 수도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수준의 ‘받아야 될 수익’ 개념으로 접근돼야 한다.
A시의 경우 1987년 정수장 시설비가 80억 원이었으나 현재 새로 재구축을 하려 계획해본 결과 380억 원이 소요돼 차입금 200억 원을 조달해 정수장을 새롭게 시설해야 한다. 이는 현재의 총괄원가계산방식이 과거 투자된 80억 원을 기준으로 감가상각을 하고 자본비용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 회계기준에도 자산의 현실가치 반영을 논의하고 있으나 특히 상하수도 원가구축에 이러한 재 구축비를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처럼 국내 수도요금은 총괄원가에도 못 미치는 요금 수준으로 인해 유수율 제고나 음용수의 수질개선을 위한 투자재원 마련이 어려워 일반회계로부터의 전입금액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총괄원가의 주요요소인 투자보수율이 외국에 비해 낮고, 또한 전국적으로 통일돼 있어 안정적인 투자재원 확보에 어려움이 상존한다.
‘수도요금 현실화’ 위한 정책개선 시급
국내 수도요금 현실화를 위한 방안으로 먼저, 가정용 요금은 수요자간 형평성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요관리를 위한 누진세는 유지하되 원가를 반영하는 요금구조를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며, 보편적 서비스 성격을 감안해 비용수준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요금구조를 설정해야 한다. 요금 지불 가능성 프로그램은 저소득층 등 도움이 필요 하다고 분류되는 소비자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영업용 요금은 종량요금제로 개선하고, 누진에 따른 높은 원가회수율은 서비스 원가로 포함해 최종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같이 개선했을 경우 수요자 간 형평성이 강화되고, 여건변화에 대한 탄력적 대응이 가능하며 운영상 편리성 및 행정적 단순성을 얻을 수 있다.
또 지역 간 수도서비스 수준에 대한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역별 격차는 보편적 서비스에 대한 사회적 형평성 확보가 불가능해지는 요인으로 지역 간 수도통합을 통해 사회 전 계층이 동등한 요금 수준의 서비스를 수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농어촌 지역의 상수도는 국가에서 일정부분 책임을 짐으로써 지자체의 부담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
지자체 간 수도요금 격차는 통합과정에서 낮은 요금을 부과하는 지자체에게는 급격한 요금인상이 발생하게 되며 원가가 낮은 지자체의 경우에는 원가가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따라서 요금 및 원가 상승 지자체에게는 손실분에 대한 일정부분의 국고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국내 수도사업의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효율성 추구를 위한 규모 및 범위의 조정이 필요하다. 또 7개 특·광역시 상수도본부 지방공사전환으로 물 전문기업의 경쟁구도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울러 사업운영의 전문성 확보 및 경영효율성을 추구해 공기업 혹은 공기업과 민간 기업이 컨소시엄 위탁운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렇게 수탁업체와 지자체 간 위·수탁 과정상 갈등에 대한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문제점 해결을 주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에 대한 국민인식 변화 뒷받침 돼야
물인권은 ‘먹는 물의 기본권을 인정해주자’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됐다. 김 소장은 “정부는 수도요금을 받아서 어디에 사용하는지에 대해 철저한 계획과 투명한 회계 공개를 통해 국민을 설득시켜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여러 전제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합리적인 원가책정 및 수도 사업을 바로 잡는 일들이 선행되는 등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국내에 물인권 정책이 도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따른 지자체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국내에 1인 가구가 증가함에 따라 가구당 최소한의 물 사용량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정한다 하더라도 당장 향후 많은 투자가 필요해 최소한의 이익을 봐야 하는 지자체나 관련 기업의 손해가 따를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국가가 나서서 조율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아직 초기 연구조차 시행되지 않은 물인권에 대해 회자하고 있는 것은 생명과 직결돼 있는 물을 기본 사용량에 맞게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사람이 살면서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이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민의 인식이 변화돼야 하기 때문이다.
전기는 끊겨도 촛불이라는 대체재가 있지만 물은 대체재조차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 쓰듯’이라는 말이 있듯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물, 이제는 제값을 지불하고 사용해야 하는 자원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국민 모두 변화가 필요하다.
김길복 소장
한국수도경영연구소(K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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